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6-27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편 97:1
너무 더운 날씨라 하루를 견디기가 힘에 겨웠다. 해가 따가울 땐 글방 에어컨은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아이가 오는 오전 시간에는 잘 가동이 되는 편이어서 다행이었다. 녀석은 아침 아홉 시를 조금 넘겨 왔다. 안경이 부러진 것이다. 당장 안경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게를 찾다 그리 되었다. 가지고 있는 돈은 생각지도 않고 새로 하고 싶은 마음만 앞서는 것이다. 소비욕구가 병적으로 강하다.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뭐에 써야 할 것 같다.
아이를 달래 조금은 참는 훈련도 필요하였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아이엄마가 연수를 끝내고 오니까, 그때 하는 걸로 하자는 말에 아이는 몸살이 난다. 내게 있는 안경테를 금요일에 주기로 하고, 월요일에 내가 하는 싼 곳으로 같이 가서 하자는 데까지 다독이며 설득을 하였다. 안경 한다고 칠만 원을 들고 온 것에서 사만 원을 맡겨두게 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어디 안경점엘 가봐야겠다는 둥 혼자 어디 뭐를 마시며 책을 보겠다는 둥 하여,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아이는 좀이 쑤시는 거였다.
아이가 돌아가고 오후께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는데 마치 누가 뒤통수를 한 대 툭, 치면서 어때? 하고 묻는 것 같았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롬 9:19).” 한동안 내가 그러고 살았던 게 생각났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 누구와 견주고 어떤 것과 비교하여 퉁명스럽게 하나님을 원망하던 때가 있었다.
곧 나의 불의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실은, 건강이 있음으로 영혼을 해칠 수 있어서였다. 돈이 많으면 그것으로 바른 길을 가지 못할 거였다. 친구가 여럿 있었으니 저들과 어울리느라 상한 심령을 더욱 무장하며 살았을 테니까 말이다. 마치 내가 아이에게 그 가진 돈을 맡기라고 하고 일정 것만 주었던 심정이 하나님의 마음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환장을 하니까, 그것으로 자신을 해코지하는 셈이니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궁극적인 긍휼하심이었다! 하도 답답하여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최소한 아이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혹은 조금은 참는 법도 익힐 겸 다음 주 월요일에 같이 가서 안경을 새로 하자고 타이르면서, 나에게 향하셨던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겠는 거였다. 사랑이란 때로 모질고 냉정하여서, 안 그러면 녀석은 네, 목사님! 하고도 계속 어떤 갈등에 시달리며 좀이 쑤셔 견디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어디 아이가 아파서 그렇겠나? 죄 된 우리의 사람됨이 모두가 다를 게 없는 거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기 전까지는 어림없다. 그렇다 해도 한 생을 사는 동안 조바심치는 우리의 물욕(物慾)과 정욕(情慾)과 이생의 자랑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그것으로 사는 자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사람과 사람이 사이의 섬이다. 땅에서 떨어져 나온 땅이다. 주가 다스리시니 기뻐할 줄 안다.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우리의 불의로 인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원망이란 그런 거였다. 시기와 질투와 온갖 욕구의 감정들이 실은 하나님을 향한 삿대질이었다. 아이를 대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하시니 그게 곧 은혜라.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주께 아뢰고 구하는 수밖에. 이번에 차를 새로 구입하면서 전과 같이 조바심내고 안달을 부리지 않아도 됐던 것이 앞서 나로 하여금 김새게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은행거래 실적이 없어 단돈 천만 원짜리 자동차도 할부로 살 수 없다니! 이것이 좌절이 아니라 감사를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내게 과분한 것으로 더하시는 것을 말이다. 그렇구나, 말씀이 옳았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아니면 소위 말해 ‘갑질’을 하듯 숱한 요구를 하고 허세를 떨며 보란 듯 자랑을 일삼았을 텐데.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이가 어련히 알아서 나를 다독이신 셈이다. 전에 같으면 또 실룩하니 마음이 언짢아 시무룩하고 의기소침하기도 했으려나? 아마도 충분히 그러고 남았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돈을 맡아두며 물었다. 기분 나쁘지 않지?
아니에요, 목사님.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좋아요. 아이의 말 한 마디에 되레 내가 고마움을 느낀다. 아,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우리에게 더하신 오늘이 어떤 어려움 또는 그것으로 인한 조급함 앞에서 과연 나는 아이와 같이 주께 말씀드리고 있었나? 툴툴거리며 희롱하는 말로 어리석게 굴지는 않았던가? 오히려 그러는 중에 감사의 말을 하게 하시려고, 나의 연역한 육신을 또는 변변찮은 형편과 사정을 ‘일부러’ 그리 두시는 거였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제격이다. 아니에요, 하나님.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나는 아이처럼 하나님께 아뢴 적이 있던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살면서, 사느라 사는 일에 찌들려 그 온갖 짜증과 염려와 조바심을 곁에 가까운 사람에게 퍼부어대며 신경질을 부리고 잠시도 못 견뎌하던 게, 실은 그게 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
녀석이 그러고 돌아가니 한결 마음이 고마워서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위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 커서 도리어 자기 고집이 있는 ‘아픈 아이’라 싫다고 할 수도 있었고, 기분이 상해서 오히려 마음이 어려웠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앞서 뭐라 한 말을 새겨들은 것이다. 그리고 나름 자기를 추슬러 이겨내는 모습이 기특하였다. 아주 조금은,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게 더하시는 오늘의 이런저런 일들이 실은 그와 같지 않던가? 누구보다 조바심치는 일에 성질을 잘 부리고 혼자 뚱해서 마음이 상하기 일쑤인데.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오늘의 말씀이 그래서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더는 그럴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과감히 아니에요, 하나님. 제가 더 감사하죠! 하는 마음으로 덧입는 것.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게 그런 게 아닐까? 금세 또 흙이 묻기도 하고 어쩔 땐 그 옷이 치렁치렁 성가시게 여겨질 때도 있겠으나, 그것이 사람이라 그렇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어떻게 또 주를 원망하기 일쑤여서 괜한 옷을 입었다 싶을 때도 있겠으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 왜 내게 이런 걸 입히셨나, 원망과 불평이 들 때도 있겠으나,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그렇듯 오늘의 환경을 조성하신다. 새로 구입하는 차의 소유권이 네겐 1%밖에 없다고 하는데도 웃음이 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어서 그 모든 일을 가장 선한 것으로 이루시고 인도하심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5).” 이를 알게 하심으로 아이에게 더 나아가 목사로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시는 일이다. 곧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145:17).” 당장 그것이 내게 불이익을 주는 것 같으나, 주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을 아는 이상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하는 말이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고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 손 들고 찬송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결코 완전할 수 없어서, 수시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을 두고 거추장스러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럴 때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망과 불평이 툭툭, 불거져 나오기 일쑤지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아이를 보내심으로 나에게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다. 곧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전혀 내가 그럴 위인이 못 되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는지!
아이가 돌아가고 오후께 찌는듯한 더위로 쩔쩔매며 찾아보던 설교 원고의 성경구절들이 나를 토닥거리며 일깨우시는 것이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더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그렇구나.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나의 엉뚱하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기억들이 도리어 주 앞에 더욱 감사를 배우게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그리하심이다. 곧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6).” 이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11).” 그러므로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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