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편 98:2
어떤 어려움 앞에 또는 즐거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뢰고 고할 수 있는 것은 복이다. 매순간이 그러하여서 어느 것도 주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것이면 더욱 그러하였다. 마치 처음인 사람처럼 새로 차를 몰고 거리를 돌아보면서 그러한 현실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이는 사도신경을 정성껏 쓰고 글씨를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일에 대하여 물었다. 한 자 한 자 그 의미를 되새기며 글자를 쓸 때 우리의 마음도 담겨 주께 아뢰는 게 된다고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그리 여겨주는 게 고마웠다.
어느 훗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문득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게 아닐까? 새삼스러운 것. 평소에 우리가 하던 감사와 또는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던 게 말 그대로 현실이 되어 만족함으로 가득한 것.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에 감사가 또 평안이 가득한 것이겠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누굴 위해 기도하는데 저가 췌장암이다. 그 어린 처와 자식 셋이 눈물겹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
때로는 원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몸부림칠 때, 그 앞에 나타나는 어떤 확신은 신비다. 안 믿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럼에도 감사와 만족이 놀라운 일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이에 대한 수긍과 용납과 적용이 내 의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고작 소형 SUV 차량 한 대를 가지고 뭐 이렇게까지 감사할까 싶지만, 아이가 삐뚤삐뚤 글씨를 써서 사진으로 보내며 ‘이렇게 쓰다보면 마음이 보일까요?’ 하는 질문에 헉! 어떤 깨달음이 또는 감탄이 주 앞에 드려지는 것이다. 마치 그 부모가 아이의 첫발을 내딛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5).”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더는 없어도 될 것처럼 다 비우고 있었더니 하나님은 그 가운데 감사가 넘치게 하시며 기어이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곧 내가 이런저런 일로 주님을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실제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하시는 일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시 98:2).”
나의 얕은, 별 볼일 없는 만족함과 감사에서도 그 은혜로우심을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145:17).” 주가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일, 내 안에 두시는 아이에 대한 마음이나 이 하찮은 만족으로도 충분하였다. 어디가 아프고 어떤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었다는 것에 대하여,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계 16:7).”
그러니까 어려움이 그저 어려움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시고, 알리게 하시며, 찬송하게도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긍휼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자를 하나님이 임의로 그리 하심이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내가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 열심이었더니 이에 응하는 긍휼하심이 아니다.
나는 늘 느끼지만 그럴만한 게 전혀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 이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에 대한 확신을 더하시는 데 있어 때로는 어려움을 궁핍함을 더하실 때도 있다. 그래서 고통 중에 또는 좌절과 원망 가운데도 놓이게 하신다. 이를 무작정 피하고 싫어할 게 아니었다.
너무 더운 날씨가 연일 되풀이 된다. 관측 이래 최고로 무더운 여름이었다고 하니 그 고통도 지난하다. 보조기는 달궈져 살에 쩍쩍 달라붙고, 에어컨은 신통하지 않아 맥을 못 추고, 어디에 오래 앉아 있기에는 허리가 아프고, 누굴 만나기도 어디로 도망가기도 못해 서러워도 하는데, 그럴 때면 아이를 돌아보게 하신다. ‘내 양을 치라.’ 하신 주님의 깊은 말씀을 알 것 같다. 단지 저를 위한 게 아니었다. 나를 위해 저를 두신 것이다. 목사님, 이렇게 쓰다보면 마음이 보일까요? 아이의 엉뚱한 질문이 나를 정지시켰다. 돌아보며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였다. 글씨를 써서 마음을 본다는 다소 생뚱맞은 표현에 옳구나, 손뼉이 쳐졌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이를 알게 하시려고 허기도 느끼게 하신다. 더 맛있게 먹이시려고 배고픔도 주신다. 이는 우리가 이룬 게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은혜를 힘입어 사는 삶이 복되었다. 작은 것으로 큰 감사를 배우게 하시었다. 큰 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영혼은 피폐하다. 친구가 휴가를 이용해 낚시를 다녀온 뒤 툴툴거리던 소리처럼 때론 내 뜻과 내 의지로 되지 않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을 이루어가고 계시었다. 곧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이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주의 주권 아래 있다.
전에는 이런 말씀이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이게 또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내가 나를 알지만 늘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금세 또 원망이 슬픔이 나를 휘두르기 십상이다. 그런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그 긍휼하심으로 나를 붙드시고 계신 것이었으니 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가. 어디가 아프고 힘들어서 서러움이 밀려들다가도 이것 또한 주가 아시는 일이라는 데서 안도한다. 그렇지 항상 주를 경외하는 일,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늘 미안하고 고마운 아내와 함께 유치하지만 시승식을 하듯 전에 살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없었던 건물이 생기로 새로 도로가 놓여 낯설기만 하였는데, 저기가 우리 첫 애 무슨 학원이었고 여기가 아들놈이 다니던 어딘데, 하면서 생생한 듯 다 기억을 하고 있는 아내의 마음에 놀랐다. 나는 가만히 운전을 하다 어느새 그런 소리를 나누게 된 우리 사이도 신기하여서 감사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인생이라.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오늘에 나를 두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 감사와 영광을.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3-4).” 한낱 대수롭지도 않은 인생을 이처럼 귀히 여기시며 오늘에 두시는 데 새삼 놀라웠다.
이 모두를 주가 지으신 것이라.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나 같은 이가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고 주를 바라며 의지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감사할 따름이었으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렇지! 내가 분수에 넘쳤더라면, 하는 일이 잘 되고 명성을 쌓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삶이었다면, 여전히 저기 어디에서 안주하고 있었을 텐데.
말씀은 나를 일깨우신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그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기쁜 일인가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해 배우는 것이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오늘 내게 두신 어떤 어려움이 또 고통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간절하게 또 사모하게 하는가.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워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에 대해 알게 하신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럴 수 있는 게 그 아들의 영이 내 안에 계심이고 이를 확신하면 할수록 어떠하든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는 일이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 나의 약함이 온전하여지게 함이었다.
늘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시 98:1).” 이는 살면서 사는 날 동안에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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