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전봉석 2018. 8. 8. 07:1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편 96:9

 

 

 

중3 아이와 카페로 내려가 수업을 했다. 너무 더운 날씨에도 곧 어디에 원고를 응모해야 해서 이 아이만은 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들. 나만 애태우며 열심이지 아이는 태평하여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보여주고 마주대하는 일은 언젠가 주 앞에 나오기를 바라서이다. 늘 보면 손에 닿을 듯한데, 교회는 싫다, 종교적인 것(?)은 싫다고 하니 뭐라고 한들 말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지는 것에 대해 어찌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대할 수가 있겠나. 베드로도 어쩌면 오랜 습성과 나름의 인식 때문에 이방인들과의 어울림을 꺼려하고 의식하였는지도 모른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2-13).” 남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좌우되는 일이 결코 없을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내 안에 이는 싸움도 이에 다르지 않다고 본다.

 

하긴, 나야말로 남들 시선을 얼마나 의식하고 살았던가! 쓸데없는 자존심도 강하고 공연한 데서 감정이 상하곤 하였으니,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외면하고 냉소적으로 사람을 대하며 살아왔다. 그런 사람이 고작 중3 아이를 두고 쩔쩔맨다. 문자에 답도 않고, 약속 시간을 허투루 여기며, 장황하게 이어지는 다짐은 늘 공수표를 날리기 일쑤고.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더 이상 상종을 안 하고 싶은데 그게 또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가 않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안 됐고, 그래도 또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앞서 1장에서도 묵상하였던 것처럼 복음은 회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삶으로도 이어져 ‘다른 복음’은 없다. 사느라 사는 게 사역이다. 누가 요즘 회사를 그만두고 목 디스크로 고생하면서도 어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느라 자연림에 들어가고, 어디 혼자 무엇을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나는 듣고도 모른 체 그냥 내버려두었다.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인데 행여 엉뚱한 데서 길을 헤매고 ‘다른 복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지만 것도 필요한 시간이 될 것이라 여겼다.

 

지금 뭐라 한들 굽힐 것 같지도 않고 본래 남과 다른, ‘자기 복음’에 겨워하는 게 있었으니. 너무 학벌이 좋아서 그런가, 방언이니 대언이니 하는 어떤 은사가 분에 넘쳐서 그런가.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르며 저를 온전히 인도하여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어떤 ‘다른 삶’이 있는가 하여 기웃거리는 것보다 어리석은 교만은 없다. 다르다고 여기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나오면 오만함이고 밖으로부터 부여되면 위선적이 된다. 뭐라 조언을 할까 하다 내게 묻는 소리도 아닌데 뭐라 할 게 있나, 싶어서 듣고만 있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내가 붙드는 것은 현실에서다. 꿈이 아니다. 이상도 아니다. 환상을 구가하는 삶이 아니다. 주어진 삶에서 질척거리며 사는 일보다 귀한 사역은 없다.

 

그게 그처럼 보잘것없다 하나 그 보잘것없는 현실을 허락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럼 가장 확실한 순종은 있는 그대로, 주신 바 그 삶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그래서 어떤 위인보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에 대한 예수님의 예화를 사랑한다. 그 안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이와 지옥이 들어가는 이가 아주 단순하고 투박하게 그려져 있다. 저가 한 게 뭐 있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열악한 환경을 개선했나? 헌신을 위해 병 낫기를 고대하며 주를 따랐나? 그저 헌데를 앓는 환자로 어느 부잣집 앞에 버려진 거지였다. 그런데 주시할 것은 예수님의 숨은 의도다.

 

예수님의 모든 예화는 익명이었다. 어느 부자가, 한 청년이, 지혜로운 처녀들이 하는 식으로 비유의 말씀에는 이름을 명명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이 거지에 대한 예화에서 유일하게 ‘나사로라 이름 하는’이란 전제로 저의 이야기를 예로 들려주셨던 것이다. 곧 유일한 단서는 저의 이름, 나사로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뜻을 갖는 그 이름의 가치가 저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지경에도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붙들고, 살아냈다. 견뎌내어 주신 바 그 생을 다하였다. 거지로, 버림받는 자로, 아무도 모르는 무명인처럼 살다 갔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게 우리에게 두시는 사역이다. 뭘 그렇게 대단하여 어떤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 실적을 가지고 어느 날 주 앞에 서는 것도 아니며, 이 땅을 사는 데 있어 이로움을 더하는 것도 아니다. 신랑은 또(!) 성령의 뜻을 구하기 위해 어디 갔다는 약사아이의 말에 나는 그렇구나, 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무슨 말 끝에 조카아이의 모자란 삶을 두고 염려하기에 우리들 보다 낫다고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사람 구실도 못하고 사는 것처럼 보여 안 됐고 불쌍한 마음이었겠으나, 내가 보기엔 저들이 더 그러해서다.

 

언제부턴가 나는 오늘 말씀을 오래오래 되씹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렇다면 생각이 나의 주장이 나를 주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지금의 이 사정과 현실을 잘 알고 계시다면, 그러므로 허락하신 삶에 대하여 내가 굳이 토를 달 게 있겠나?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 가운데서 왜 이 일을, 저 아이를 맡기셨는가? 이에 집중하는 게 지혜일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렇지. 믿음 안에서다. 그렇게까지 내 삶을 귀히 여기시고 나를 위하시는 사랑인데 몰라서 나를 한심하게 놓아두시겠는가! 어제 자동차 등록이 끝났다며 등록증과 함께 곧 인도될 차량을 사진으로 보내왔다. 나는 이래저래 은행 거래가 없어서 딸애를 같은 계약자로 세운 일인데, 서류상에 나는 1% 딸애는 99%의 소유권을 가졌다고 명시되어 있어 한참을 서로 웃었다. 기분이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상관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웃겼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로서 면도 안서는 일이고, 가장으로서 자존심도 상하는 일인데 말이다.

 

내가 따로 어떤 마음의 각오를 해서가 아니라 그렇듯 하나둘 아무렇지도 않은 게 늘어가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든, 형편이 어떠하든, 실제 그 고통이 어떻든지 ‘이제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떠나가고, 누가 우습게 여기고, 내 곁에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해도 전에처럼 그게 그렇게 의식되거나 무섭지가 않은 것이다. 아, 어쩌면 ‘나사로라 이름 하는 거지’의 경지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왜 주님은 굳이 한 거지라 하지 않고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여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일까?

 

그냥 한 거지라 하면 그 이야기 안에 핵심이 빠진다. 자칫하다간 숙명론자가 된다. 기껏 말씀을 듣고는 운명론자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한데 그게 아니다. 저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거지’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붙들고 사는 삶이 전부다. 그 뜻을 바라고 의지함으로 묵묵히 오늘을 딛고 한 발 한 발 살아내는 게 숭고하다. 선을 행하여 또는 어떤 의미 있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여 헌신하여서가 아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여기서 사랑이란 ‘나사로라 이름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부자와 거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가 아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도 아니다. 어찌 살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부자는 부자여서 호의호식하다 죽어 지옥에 간 게 아니다. 저의 곁에 ‘나사로’가 있었으나 저는 몰랐다. 외면하였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기 의와 목적이 굳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사할 필요가 없었다. 매우 성공한 삶이었다 해도, 또는 복 받은 인생이었다 해도 그 모든 것은 헛되다. 헛되고 헛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린 겨와 같이 헛되다.

 

오직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약속의 거룩한 땅에서도,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 96:9).”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러니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말씀 앞에서 웃음 지을 수 있는 것은 무언가? 그러고 보니 내게 1%의 소유권밖에 없다고 해도 웃음으로 즐거울 따름인 것이다. 그저 모든 걸 주께 돌리는 일.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시 96:7).” 주가 이루신다. 그랬으면 했던 것에 대하여 일사천리로 나는 상관없어 저절로 그렇게 뚝딱 이루어 가시는 일을 마주하는 일에서 웃음을 짓는다. 그저 다만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내 일이 거기였다.

 

주신 오늘 이 한 날의 삶으로 감사하는 일, 묵묵히 두신 바 밭을 갈고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을 즐거워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복되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1-13).” 이에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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