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전봉석 2018. 8. 20. 07:06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1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편 108:1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서다 보기 좋게 넘어졌다. 주변을 지나던 이들이 달려와 괜찮나, 도와주려하였다. 무릎이 까지고 정강이가 패여 아팠다. 식당에는 아직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모멸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른 시치미를 떼고 들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굴었다. 어떤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이는 나를 정확히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였는지, 우리가 왜 그 귀한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는지, 이는 경거망동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한동안 드센 열심을 자랑하던 어느 교회 여러 목사와 교수가 스스로들 이단적인 교리에 빠져 ‘피복음’을 강조하며 ‘모든 게 다 용서되었다.’는 논리로 구원을 흐리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심지어 저들 무리에서는 이혼을 조장하고 자기끼리 맺어주는 영적인 혼인을 강요하고, 장래의 모든 죄에서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식으로 복음을 어지럽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착잡하였던 것은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 수 있다는 데서였다. 그리곤 보기 좋게 패대기쳐지듯 자빠졌으니, 늘 보면 하나님은 절묘하시다.

 

오늘 말씀은 그래서 우리 자세를 축약하여 서술하고 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그런데 그게 우리가 바라던 게 이뤄지고, 어떤 기대와 소망이 충족되었을 때가 아니라 도리어 어려움을 통해서다.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고 허덕일 때다. 이는 하나님이 모순되신 게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악해서다. 신기하게도 좋을 땐 방종 한다. 설마, 하는 안일함이 영혼을 좀먹는다. 되레 우리의 열심과 열의가 우리를 교만하게 한다.

 

아이에게 핸드폰케이스를 하나 구해주고 우쭐하였는지 모른다. 늘 깜빡하며 지갑을 어디에 두고 잃어버린 줄 아는 아이를 위해, 건물을 조금만 돌아서도 갈 길을 잃는 아이를 건사하느라 배웅을 하고 돌아서면서 조금은 나의 열심을 자랑하는 마음이었던가? 어쩌면, 또는 그게 아니라 해도, 늘 매순간 내 안에 이는 여러 당위적인 자기만족에 대하여 나는 고백한다. 내가 이 정도했고, 이런 사람이며, 이렇듯 주를 바라고 세상을 여긴다고 우쭐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발을 거신다. 넘어뜨려 다시 생각하게 하신다.

 

돌이켜 저들 무리가 어떤 교리에 빠져 무슨 복음을 운운하며 그처럼 제 길에서 벗어났다는 말에 나는 우리의 어려움이 축복인 것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면 스스로 어떤 위인인지 그 교만함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주의 사랑은 징계를 통해 알려진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이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12).” 성경은 일러,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 13:1).” 다들 사느라 여념이 없어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사나, 하는 궁리에 절어갈 때 하나님은 이를 알게 하신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29:15).” 다들 이를 피해 간구하고 바라나,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의 어려움이 정표였다.

 

왜 더 나아지는 게 없나, 낙심할 게 아니었다. 뭔가 성과를 내지 못해 시무룩할 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열심과 나름의 자구책이 성경과 멀어지게 한다. 성경을 왜곡시킨다. 달리 듣고 엉뚱한 소릴 하게 한다. 그 원인이 느릴 때보다 빠를 때였다. 그렇지, 늘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이런 사단이 난다. 하나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9-10).”

 

말 그대로 계시다. 내가 그 이치를 아는 게 아니다. 알게 하시는 이가 열어보이심으로 들리고 깨닫고 돌이켜 주를 바람이다. 우리의 예배도 그런 게 아니겠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곧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찾으시고 불러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열심을 다해 무슨 형식과 이상으로 꾸려지는 게 아니었다.

 

누가 그 노년에 어떻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목사로 교수로 부르심을 받아 그처럼 열심을 다해 무슨 신학교도 운영하고 여러 사람을 교육하기에 그처럼 열정적이던 무리가 웬 이단교리에 휩쓸려 저들만의 신학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지상낙원을 꿈꾸기도 하면서! 결코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 장담할 수 있겠나? 그래서였구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게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자칫 그릇 행하여 각기 자기 길로 가기 십상이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그래서 날마다 죽어야 하고, 날마다 부활이며, 날마다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하는 일이었다. 행여 이루었다 할 때 쓰러지고, 다 채웠다 할 때 쏟아지기 일쑤인 것이라. 이는 우리가 얼마나 모순덩어리인가를 알게 한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기 때문이다. 누구에 대해 무슨 말을 하기는 즐겨 해도 자신을 두고 주 앞에 세워가는 일에는 나태하다.

 

나는 자빠져서 순간 밀려드는 통증보다 어떤 부끄러움으로 그 시선을 피하면서 느꼈다. 어쩌면 가장 나다운 나의 연약함과 어려움이 나를 살리는 축복이었구나! 늘 주목하는 걸 보면 실제는 그게 나 자신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어쩌면 나 살 궁리의 하나로 영생을 꿈꾸고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는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사람과 일을 도모하고 자신의 뜻을 살피는 데는 영락없다. 성경의 증거는 그게 아니었다.

 

오직 예수,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거기에는 황홀한 변화산도 없었고, 영롱한 모세도 존귀한 엘리야도 없었다. 그렇듯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막 9:8).” 그런 자리로 이끄신다. 거기에 두신다. 죽을 뻔하고, 죽을 것 같을 때 비로소 우리 입에서 튀어나오는 외마디 탄성, 주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 108:1).”

 

내 의지와 재능과 수고와 열심의 모든 것을 깨워야 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2).”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3-4).” 나로 하여금 사람의 구원이 헛되고 헛됨을 알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2).”

 

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13).” 그래서 바울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나에게 두신 이 구원을 이루라. 곧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3-14).” 그런 와중에서 감사를 배운다. 신기하기도 하지? 자빠지고는 감사를 새삼 익힌다.

 

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러할 때 우리가 붙들 것은 말씀뿐이라. 그러므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오늘 말씀은 나를 꿇리신다.

 

그리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내게 두시는 이 마음이 보배였다. 곧 나로 하여금 주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1).” 그런즉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 내가 할 일은 그것이었다.

 

부디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시 108: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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