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9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나는 중3 아이에게 말했다. 네가 잘 되길, 어디에 글을 내어 좋은 성과를 거두길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게 주일에 나오길, 나와 함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그 맡기신 삶을 살아가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아이의 돼도 않는 말을 듣다 그리 일갈하였다. 왜 기분이 뚱한가했더니 엊그제 상을 탄 그 글의 내용을 아이엄마가 읽었는가보다. 자신들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기였으니 기분이 별로이긴 하였겠다. 엄마의 그런 기분이 또한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을 테고.
냉정하지만 어쩌겠나? 그래서 뭐?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저도 처음이라 이런저런 게 실패로 이어졌고 그와 같은 사실은 남 앞에서 숨긴다고 해결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나? 당장 낼모레 어디 또 소설을 내야 하는데 아이는 손도 못 댔다. 뭐라 할 말이 아닌 것 같아 그러려니 하고 두었다. 다행인 건 이래저래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것이다. 불행하다고 여기는 현실도 네 것이다. 부끄럽다고 여기는 가정사도 네 것이다. 그래서 뭐? 안 그런 척 거짓용서와 화해는 금세 곪는다. 나는 아이에게 주를 권하였다.
이 복음이 큰 이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8-9).” 이를 어찌 아이에게 설명하여 설득할 수 있을까?
부모의 이혼과 씨 다른 언니와의 반목으로 병적인 외로움을 안고 사는 아이에게 내가 무엇으로 전하여야 할까?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줄 건 없으나 예수 이름으로 권하고 들려주어 사는 날 동안의 이 값진 사실의 값어치를 알게 하는 일. 당장 만물의 주(主) 되신 이에게 만물이 복종하지 않는 세상에서, 오히려 힘없이 무력하게 죽음을 맛보고자 한 그 사실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 결국 너와 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로써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아이는 엉뚱하지만 우주에 또 다른 생명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둥 이 정교한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는 건 믿어진다는 둥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에 대하여 갈팡질팡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는데 이를 알려고 하지 않으니, 그럼 무신론자였던 파스칼의 ‘내기 이론’을 설명해주었다. 신이 있거나 혹은 없거나, 하나님을 믿거나 또는 안 믿거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있다고 믿고 사는 일과 없다고 믿고 사는 일에 내기를 거는 식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전적인 무신론자로서의 철학이다. 없다고 여기고 사는 일 보다 있다고 여기고 사는 일이 더 유익한 것은 훗날에 진짜 없을 때와 또 진짜 있을 때의 결과에 대해 그러니 안 믿는 것보다 믿고 사는 게 낫다는 식의 이론이었다. 어쩌겠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복음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내보여 계시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지만, 나는 아이의 상식 앞에 그리 생각할 시간을 두었다.
아이가 오고 안 오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영접하지 않고의 문제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이제 확신한다. 구원이란 더 이상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된다. 여전히 자기 문제로 씨름하고 자기 확신에 겨워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주를 믿는다고 하는 이는 파스칼과 같이 자기 이론에 충실할 따름인 것이다. 주의 영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은 내 상태나 기분이나 어떤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게 아니다. 오늘 말씀도 이를 알게 하신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아등바등 내가 살 궁리로 사는 일은 고달프다. 늘 기도의 제목이 그쪽이라 이미 이뤄진 기도를 뒤로하고 자꾸 고달프게 새로 구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일은 한도 끝도 없다. 이것만 이뤄지면 더는 바랄 게 없다고들 하지만 그것만 이뤄져서 더 바라야 하는 게 늘었을 뿐이다. 나는 아이에게 세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었다. 첫째는 ‘모르겠어요.’ 하는 것이다. 회피다. 정말 몰라서 모르겠어요, 하는 게 아니다. 둘째는 ‘나중에요.’ 하는 말이다. 정말 나중에 그리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당장을 모면하려는 자기방어다. 셋째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는 소리다.
이 세 가지는 아이의 버릇이면서 나의 습관이고, 우리로 불순종하게 하는 굳어진 자세였다. 절대 모르지 않다. 오히려 안다고 여기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면서 모르겠다고 발을 뺀다. 다음으로 미루려는 수작이다. 미룬 건 값어치가 별로다. 아직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알면서도 그런다. 당장 몸에 밴 습성이 좋아서다. 그래놓고는 이내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고집이다. 아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우리 이야기다.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다를 게 없다. 다들 자기 고집으로 산다.
주의 권능이 아니고는 돌이킬 재간이 없다. 주여,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나는 널 위해 기도한다. 네가 잘 되길, 행복하길, 이번에 쓴 글이 좋은 결과가 있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를 위해서다. 그게 또 고약하게 막힌 것은 아이엄마가 교회를 다녔었다. 아이아빠도 교회를 다닌다고 했나 다녔었다고 했나? 그들 부모의 오늘이 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정하고 멀리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엄마의 기분을 이해하고, 그 화풀이를 용서하고, 저들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보다 넓은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기를, 아이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니 어쩐다? 불행하다 여기면 불행하게 사는 수밖에.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면 부끄러움을 감추고 사는 수밖에. 모처럼 아이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디 주를 바라며 우리가 함께 주께 나아가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모르겠다. 나는 하면 할수록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서너 주 더위를 피해 집에서 하였던 기도회를 다시 교회에서 드리기로 하였다.
이런저런 아이들의 일을 서로 나눈다. 딸애는 직장에서의 일을 기도제목을 놓는다. 이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주께 아뢸 뿐이다. ‘주 안에서 서로 하라.’ 오늘 말씀은 일깨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곧 우리가 같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는 소리다. 서로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3).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찌 기뻐할까?
언제부턴가 우리 안에 두시는 관용이 있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말이 좋아 아이지, ‘그런 아이들’은 고약하다. 거짓말을 잘 하고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자기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무식하면서 아는 체 하고 자기가 아는 것으로 들으려하지 않는다. 같이 있다 보면 신물이 나고 생목이 올라온다. 욕을 퍼붓고 그냥 돌려보내고만 싶다. 무슨 공식과 같아서 ‘그런 아이들’에게는 ‘그런 부모’가 있다. 아이가 이를 극복하고 그 이야기로 좋은 상까지 받았으면 인정하고, 축하하고, 미안함을 가져야 할 일이지, 왜 그런 얘길 밖에다 하냐며 짜증부리고 욕할 일인가?
싫증나는 아이들과 그 역겨운 엄마들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놀라운 비밀은 언제부터 하나님은 우리 속에 관용을 두셨다. 우리 안에 두신 그 관용을 사람들로 알게 하라.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우시다. 어떤 이야기 끝에 그럼 너 오지 마! 하고 돌려보내야 하는데 다시 끌어안고, 다시 끌어안는 일이 관용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버틸까? 무슨 수로 감당할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우리에겐 주께 아뢰는 특권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지키신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뿐이다. 그처럼 하나님께 비는 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 이를 같이 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9).”
단지 내 생각과 의지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다. 내가 저 아이를 상대하는 이유도 성령 안에서다. 예수가 아니면 대체 내가 왜 저런 아이를!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해 쩔쩔매는 주제에도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4).” 우리 기도에 주는 응답하신다. 저 아이는 또 세상은 끝내 시치미를 뗀다 해도, 이 비밀을 나타내신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안도하게 하신다. 즉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며 유익한 것은 기도제목을 내어놓을 때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딸애는 옆자리에 나란히 앉는 뚱한 과장을 납득할 수 없다. 어울리기 싫고 더러는 한심하여 짜증까지 난다. 그럼에도 말을 걸고 한 번 더 돌아보는 일이어서, 벽처럼 닫혀 있던 저의 문이 많이 열린 것 같다며 기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게 왜 우리를 기쁘게 할까? 곧 우리가 사는 일이 사역이라. 두신 자리가 목회다. 아내는 변덕스러운 아이엄마들을 상대하느라 진을 빼면서도 그 위로를 주께 둔다. 아니면 더는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11).” 감사가 전파되는 것이다. 이에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스스로를 돌아보아 주 앞에 세우게 되는 일이었다. 그 구조가 단순하여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소리다. 더 말해 무엇하나? 그러므로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 우리가 두는 생각에 싹이 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1-12).”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리도 행하게 하시는 이의 능력 안에서 가능하였다. 곧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그리하여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주가 채우신다. 우리는 다만 이 모든 상황 중에서 주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20).”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3).”
이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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