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립보서 3:16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09:4
더 나은 누군가를 닮고,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익혀 열심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두신 바 그 형평을 잃지 않고 순응함으로 감사를 이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이때 늘 내 안에 두시는 말씀이 있다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누굴 닮고 무엇을 배워 어떻게 익혀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또 그렇게 순진하지가 않다. 그래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
또한 자칫 저를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길 수 있고, 배운 것을 전부로 둔갑시켜 신봉하며, 저들의 ‘어떻게’를 마치 불변의 진리인양 강요하기 십상이다. 보면 늘 그렇더라. 사람이란 게 결코 신뢰할만한 존재가 아니어서 좋을 땐 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구나 그런 사람이 돌변하여 자기를 변호할 때면 악마 악마 그보다 악한 존재도 없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 대해 뭐라 좋은 뜻으로 이해하고 고마움을 두는 것까지는 알겠으나 그것을 마치 절대불변의 법칙처럼 받아들일 때면 경계한다. 이에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세상에 자신을 다 줄 사랑은 없다. 미안하지만 부모라 해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가장 매혹적인 거짓말은 ‘너를 위하여’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사랑하는 이가 그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또는 간헐적인 헌신과 희생이 고귀한 것은 사실이나 절대적이지는 않다. ‘위하여’의 사랑은 하나님 한 분밖에 온전하신 이는 없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요 11:15).” 주님의 ‘위하여’는 그로 인해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살아나셨다.
곧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14:2).” 그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왜냐하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 지금도 주님은 나를 위하여 일하신다. 이를 알고 붙드는 삶은 달려가는 삶이다. 어떠하든,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서든 묵묵히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할 것’을 무던히 감당하는 게 순응이었다.
곧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그렇지!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위하여’서 말이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저마다 나름의 판단과 기준으로 덤벼들거나 멀리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우리는 죽어 이 땅을 떠날 것이다. 죽음 너머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말씀으로 그리 알고 말씀으로 그것을 대비하는 게 성도의 삶이다. 나는 아이가 금세 돌아서면 또 까먹을 것을 알면서도 같이 읽고 들려주고 적어보게 한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렇게 또 아이가 네, 하고 한다. 다들 이 아이보다 건강한지 온전한지 알 수 없으나 아이만큼 순수하게 네, 하고 따르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신기한 건 이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얼추 외웠다. 주도적으로 혼자 암송할 수는 없어도 같이 하면 그 첫 음을 따라 함께 고백한다. 요즘은 시편을 가지고 묵상한다. 내용이 짧은 만큼 여러 말을 하게 둔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을 붙들고 필사하며 손에 익히듯 마음에 새긴다. 아이는 여러 번 쓴 것 가운데 ‘예쁘게’ 쓴 것을 골라 사진으로 찍어 보내온다. 나는 이것으로 우리의 영을 살리는 일임을 확신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가끔은 대체 내가 ‘이런 아이’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다. 과연 이런 일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어떤 성과를 낼까? 뭐가 달라지기는 할까? 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여러 생각이 나를 걸어 넘어뜨리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 두시는 나도 알 수 없는 어떤 만족이 있었으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6).” 나는 아이를 만나는 일이 영적으로 즐겁다.
같이 말씀을 읽고, 아이의 되도 않는 설명과 이해와 느낌을 듣고, 예전에 있었던 간헐적인 기억들을 들어주는 일에서나 현재의 아이 눈에 비치는 모순된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일에서도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가 나더러 힘들겠다, 어떻게 같이 어울려? 하고 물으면 나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뭐가 왜 좋은지 모르겠으나 내 안에 두시는 만족함이 그러니까 그게 내 것이 아니라는 데는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아이가 기도할 때 횡설수설 뭔 말을 하는지 두서없으나 그 마음이 읽혀져 어느새 입가에는 배시시 웃음이 밴다.
신기하지?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서로가 이런 말을 해봐야 뭐하겠나 싶지만 우리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 내가 요즘 입만 열면 아이에 대해 또 아이들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은 온통 내 안에 그 생각뿐이어서 그렇다. 주가 두시는 마음이라 여긴다. 성도로 사는 삶의 사명이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하는데, 이를 뭔가 대단하고 가시적인 어떤 결과로 말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조금만 달리 생각해도 우리가 뭐라고, 뭔들 그것으로 주께 영광이 될까? 학위를 따고, 수천 명을 변화시키고,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쭐하실까? 빙충맞아 늘 제자리걸음이듯 한 게 없는 듯하나, 모든 게 이미 이루어진 것이 주의 일이다. 나는 다만 뿌릴 뿐이다. 그 씨앗이 어찌 저 아이 마음에 묻혀 언제쯤 지나야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게 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묵묵히 두신 바 오늘에서 오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 입을 열면 어떤 말을 하고 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에 관심이 쏠려 있는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란 숨 쉬는 일처럼 주를 바라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나의 이 시간이 그저 인위적인 게 아니라 마땅한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때 주는 영화로우시다. 어쩌면 나의 하루는 이 시간을 위해 있다. 말씀을 읽고, 책을 읽고,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루의 모든 일과가 아침에 일어나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주를 바라면서 풀어진다. 뭐에 뚱했고, 어떤 일에 고달팠으며, 또 뭣 때문에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었는지. 그러므로 그것밖에 안 되는 나를 주께서 붙들어주시기를.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 해야 할 게 기도이고, 기도 말고는 대체 저 아이를 위해, 내게 맡기신 이 몸뚱이를 위해, 불확실한 장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른 어떤 대책을 강구할 수 있겠나? 그러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오늘 말씀 앞에 이보다 더 확실한 묘책은 없음을 인정한다(시 109:4). 그리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먼저도 나중도 성령 안에서다. 내 생각으로 나의 푸념을 늘어놓으며 그 요구를 되풀이하는 게 아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란 이를 위해서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한다. 그냥 막연하여서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에 따른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조명하며 저들의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주를 부를 수 있는 일. 이를 힘쓰며 성도를 위해 구하는 것이 내게 두시는 사명이었다. 내 앞에 두시는 ‘저 아이’, ‘저 사람’, ‘저 한 영혼’을 위해 구하는 일.
그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5).” 한 날이 수고가 그러하였다. 그러는 내게 휴식을 주시는가. 딸애가 월요일 휴가를 내어 같이 영화를 보러 갔다 왔다. 다 자라 이제는 나를 돌보고 건사하는 아이의 마음이 고마웠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 기도를 부탁하는 일에 주저할 건 없다. 매순간이 기도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우리의 생각이 즉 간구가 된다. 아직 그 영혼이 주를 바라지 않고 교회로 나오지 않으며 아무런 기대도 성과도 어떤 희망도 둘 게 없는 아이들이라 해도 우린 그 아이들을 놓고 기도한다. 안 믿는 저들 가정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 교회로 오고 안 오고, 구원의 일은 주께서 하실 것이고 우리는 다만 맡기시는 아이들을 위하고 돌보며 그 영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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