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전봉석 2018. 8. 29. 07:10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3:8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시편 117:1

 

 

 

믿음의 싸움은 죽는 날까지 거듭될 것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저절로 생겼으니 저절로 자라거나 그대로 있어주는 게 아니었다. 그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10).” 그러나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8).”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며 읽은 말씀에서 한 날의 고심이 단번에 해결되는 듯하였다. 얽히고설킨 막내 동생 교회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은 뒤 마음이 복잡하였었다. 우리 중3 아이가 전날에는 당장 그만둘 것처럼 변덕을 부리더니 천연덕스럽게 열심을 다해 아리송하였다. 혹은 아픈 아이의 이모되는 친구가 아침 일찍 전화를 주어 아이에 대해,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로 속이 복잡하였다. 종일 가을 장맛비는 억수로 퍼부었고, 몸은 어디가 힘들어 사람을 들들 볶았다.

 

결론은 각자의 믿음이라. 자기 믿음을 바로 지키고 사는 게 지혜로울 거였다. 누가 뭐라고, 어디 어떤 이들의 무슨 이야기에 휘둘릴 거 없이 말 그대로 자기 신앙이나 제대로 지키며 사는 게 복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믿음의 거장들도 보면 참 그렇다, 싶을 정도의 현실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주를 바라고 섬겼다. 가령 존 번연의 경우에 저의 12년 동안 감옥살이가 없었더라면 그 주옥같은 <천로역정>이 탄생하였겠나? 찰스 사이언 목사의 경우 54년 목회를 하는 동안 54년 내내 반대와 반대에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샘물과 같은 보혈로>를 작사한 윌리엄 쿠퍼에게 그 고질적인 우울감과 자살충동이라는 신경증은 그래서 더욱 주께로만 마음을 기울이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선교사의 짧은 생애는 또 어떻고! 나는 막내 동생의 구구한 교회 사정을 듣고 있으면서 그러그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비와 다툼에 대하여 환멸이 왔다. 중3 아이의 변덕스런 열심에 기특하기보다, 누굴 놀리나? 싶은 감정도 상하였고!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 믿음으로 믿음 안에서 굳게 서는 일, 사람이나 사건을 보고 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 가족보다 복된 관계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서로가 주의 사역자로 산다는 일에서 먼저는 위하여 서로 기도하고,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3).” 그러저러한 세파가 없을 수는 없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 중심을 하나님께 두는 일, 말씀을 붙들고 말씀만으로 의지하며 서는 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4).”

 

오늘 이 말씀이 어떤 위로의 의미인지 알 것 같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 주 안에서 굳게 선다는 게 은혜다. 솔직히 이런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이상한 목사가 너무 많고 그것에 현혹되어 사람들이 이리 쓸리고 저리 몰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막말로 다들 자기 멋에 겨워 살 듯 각자의 믿음으로 사는 날이 온 것이다. 어느 큰 교회의 오래된 사람들의 이런저런 부대낌이 각각 또 그럴 수 있는 처지의 일들이었으니, 다들 자기가 옳다 하고 사는 꼴이 아니겠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9).” 나야말로 민망한 사람이라 겨우 아이 한둘,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도 쩔쩔매는 터라 그런 일에 대해 뭐라 할 게 없었다. 다만 두시는 마음으로 무던하기를, 저 아이로 인해 넌더리가나도 참을 수 있는 것은 그게 저 아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보내시는 주를 바라며 가능할 거였다. 아꼈다가 간식을 꺼내어 주고 어르고 달래 그 마음을 다독이며 용기를 더하는 일.

 

어쩌면 이것이 말씀과 경건을 따르는 일이 아니겠나?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딤전 6:3).” 그 교훈은 먼저 마음에서였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행위로 감추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21:2).” 그래서 그 걸음으로 말한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10:9).” 그래서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4:26).”

 

이처럼 말씀으로 말씀을 연관 지어 하루하루 생활을 돌아보는 일이 귀하였다. 딱히 나는 동생에게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 교회의 이런저런 사정을 듣기만 하였으나, 오히려 그런 가운데 나를 두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었다. 사람 참 지겹다. 어려서부터 나는 늘 누구의 시선과 어떤 응원에 허덕거렸고, 그러느라 늘 얽매여 살았던 사람과 사람사이가 죽기보다 넘치게 싫었다. 싫어서 싫은데 더 붙들려야 하는 게 관계라, 돌아보면 사람보다 믿을 게 없는 게 또 없다. 그런 내게 두시는 오늘 이 한 날의 한 사람, 저 아이 하나로도 분에 넘치는 일이어서 동생의 이어지는 말에 한숨만 나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충성은 맡긴 자의 뜻을 바라는 일이지 나의 판단과 선호를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맡은 자는 맡긴 자에게 오히려 자신을 맡긴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주가 이루실 것을 아는, 깨달음이 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11:14).” 이처럼 잠언의 말씀은 명료하여서 그 간결한 결론이 허튼 노력을 자제하게 한다.

 

보면 너무 열심이라 그런다. 죽어라 하고 담임 목사와 척을 지는 장로나 그 장로의 권세에 눌려서 뜻을 같이하며 편을 가르는 이쪽 사람이나 저쪽 사람이나, 다들 참 안 됐다. 옳고 그름이야 누구 귀에도 들릴 리 없는 소리여서, 그런 거 보면 자족하는 마음을 주신 게 가장 큰 축복이라.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21:15).” 정의란 나는 죄인인 것을 통회하는 마음에서 구하여 그 길을 여는 방향이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27:9).” 함께 가는 이의 발걸음이 위로가 크다.

 

누웠다 앉았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때론 지겨워도 지겨워서 성경을 찾아보고 누가 쓴 어떤 성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모처럼 팀 켈러의 <예수, 예수>라는 책을 주문하여 샀다. 부제로 붙은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을 여러 번 되뇌며 읽었다. 내게 두시는 어떤 장애가 오히려 나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묵묵함으로만이 이 길을 갈 수 있는 게 아니겠나, 혼자 생각하였다. 사람을 보고는 턱도 없고,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면서는 어림도 없다.

 

겸손과 절제와 적당함이 지혜였다. 늘 나를 낮추는 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16:19).” 곧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8-9).”

 

그런 거보면 좀 사이비 같은 소리지만, 이상하게 나는 필요해 하면 그때마다 다 주신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25:27).” 보니까 족한 줄 아는 게 늘 넘치는 감사로 연결되었다. 늘 과분한 사랑이다. 이번 주에 아들이 들어오면 하다못해 어디 가까운 데라도 가서 모처럼 네 식구가 여행 좀 하자, 하는 아내의 투정 아닌 투정을 듣고 있었는데, 딱 그렇게 맞춤하니 주님이 예비해주신 일들이나 그 손길을 무엇으로 보답할까? 일일이 열거하기 민망하나 보면 늘 그때마다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신다! 송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괜한 소리가 될까봐 더 말을 할 순 없으나.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늘 이와 같은 순간을 살 수 있다는 게 감사의 정도이지 않겠나?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서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3:10).” 나로 하여금 지금 이 자리, 이 길을 묵묵히 갈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보면 하나도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고작 저 중3 아이에게조차 내가 어쩐다고 해서 애를 건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오늘 말씀 앞에 아멘, 아멘이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시 11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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