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0-11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119:49-50
늘 보면 정신이 없고 두서가 없다. 온다는 말도 없더니 들이닥쳐 금방 또 가야 할 사람처럼 김밥으로나 점심을 먹자더니 두어 시간을 뭉개다가 갔다. 늘 바쁘고 쫓기듯 산다. 저이가 왔다 가는 날이면 덩달아서 정신이 쏙 빠진다. 이런저런 우리의 말은 종잡을 수 없어서 어지러웠고, 흩어지다 이어지는 말들로 인해 자꾸 할 말을 놓치고는 하였다. 이제 네 번째 글방에 온 우리 중1 여자아이 같다. 학교에서 수제 햄버거를 만들었는데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글방으로 오면 되는 길을 집에 들렀다 잠이 들어 늦어서야 왔다.
그러는 거 보면 다들 바쁜 시절이다. 애고 어른이고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이는 상대적으로 먼저 해야 할 걸 모르거나 미루기 때문이다. 우왕좌왕 닥치는 대로 하는 까닭이다. 정신없이 바쁜 건 영적으로 게으름을 내포하기도 한다. 어느 게 우선인지 두서가 없기 때문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
나름은 애쓰고 수고하였으니 늘 보면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이 구구하다. 억울하고 원통한 것이다. 바쁘다는 걸 무슨 훈장처럼 여기는 세상이라, 그래놓고는 정작 이룬 게 없다. 이것도 찔끔 저것도 찔끔 돌아서니 도로 다시 해야 할 일들이다. 중1 아이는 시간 약속도, 해야 할 일도, 남의 말에 대한 책임도 전혀 없다. 네, 하고 돌아서면 그뿐이다. 뭐라 하면 오히려 할 말이 더 많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그래서 아무 것도 못해 억울하다는 식이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그렇게 누가 다녀가면 하루가 금세 기운듯하다. 거기에 중1 여자 아이 둘 수업까지 마치고 나니 나야말로 정신이 쏙 빠졌다. 앞서 동사무소에서 무슨 일처리를 하는데 그 일을 맡은 여자의 손길도 그러하여서, 다들 그렇듯 바삐 사는 게 일상이라 나만 여유를 부리는가, 하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정작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10).” 누가 말하길 꼭 목사를 해야만 사역인가? 하고 되묻자 그것보다 전심으로 주를 찾을 수 있는 길은 없지 않겠나, 대답하였다. 다들 이런저런 일에 쫓겨 그 와중에 말씀을 접하고 짬을 내어 기도하는 일과에서 늘 말씀 붙들고 기도로 정적인 삶을 살아도 되는 게 목사가 아니겠는가, 혼자 그리 생각하였다. 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에서 무엇이면 더욱 주를 바라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차원에서.
그래서 존 파이퍼 목사는 너무 성공하려 하지 않기를, 너무 공부 잘하려고 하지 않기를, 너무 열심을 다하려 하지 않기를 조심스럽게 권하기도 하였다. 누가 저의 신랑이 요즘 몸이 안 좋아 쉬는 동안에 벌써 성경을 일독했네, 매일 새벽예배를 나가네, 어디 무슨 모임에 참석하네, 하는 소리를 듣다 그와 같은 지나침이 오히려 안 좋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애쓰지 마라, 하는 말로 대신하였으니 오히려 열심이 우리를 삼킬 수 있다는 소리였다. 자칫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그러므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이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0-11).” 이 모든 것이 주의 은덕인 것을. 마치 갚아야 하는 채무로 여겨 그리 열심이라면 은혜가 소멸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자명하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19-22).” 내 마음에 두시는 주의 생각을 묵묵히 실천하고, 말씀을 붙들며, 범사에 헤아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취하고, 어떤 모양이든 하나님과 껄끄러워질 일을 만들지 말라. 나는 그리 들린다. 필리핀 동생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면서도 사람과 사람이 다 그렇고 그렇다. 한 다리 건너가 낭떠러지라 그 간격을 좁힐 수 있는 사이는, 함께 주의 뜻을 구하는 것뿐이다.
사업에 대해서야 내가 아는 게 있나? 다 좋은 건 좋을 때뿐이니, 서로 그 사이를 이어가는 게 일이라. 어쩌겠나?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일이란, 내가 좋은 쪽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실 쪽으로의 길이다. 그렇지 않고는 영락없다. 나야말로 워낙에 사람을 좋아하던 사람이라 사람이 어떤가는 조금 안다. 나 역시 안 그렇겠나만, 피차가 좋을 때나 좋은 것이다. 너무 엎어지지 마라. 그러려니 거리를 두어야 하고 적당해야 한다. 더욱이 인친척의 관계라는 게 불가근불가원이어서 딱 그만큼이 적당하다고 말해주었다. 보니 저들끼리도 다툼은 있었고 그러느라 공생은 어려운 법이다.
뭐라고 이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다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주만 바라는 수밖에. 나는 요즘 그것에 더욱 주의하는 것 같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그리 행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가 먼저이다. 동생도 이를 알아서 어쨌든 서로 맞춰가는 중이었으니 세상이 마냥 좋은 사람과 사람 사이는 없는 법이다. 말씀으로 참고, 말씀으로 인내하며,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 것뿐이다. 나에게 사람에 대해서도 소망을 가지게 하시는 것이 말씀이지 않나!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49-50).” 오늘도 말씀 앞에 앉아 그리 확신을 더한다. 하다못해 부부사이도 으르렁거리면서 주를 바라며 위하고 사랑하는 사이인데,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늘 똑 같은 말을 되풀이 해야 하는 아이 앞에서, 진절머리가 나고 아주 지겨워 넌더리가 날 정도에도 그것까지도 주를 바라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말씀을 음미하고 있으면 그 맛이 오묘하다. 장성한 자식에게는 더 이상 순종을 강요할 수 없고 다만 그 이치에 맞게 어려서 익힌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 일이어서, 율법도 믿음이 있기 전까지만 득세한다. 엄격하게 또는 원칙대로 굴다가도 그리 행할 수밖에 없는 저의 행실이나 마음을 주가 더 잘 아실 텐데, 하고 돌아보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라. 너무 애쓰지 마라. 주를 바란다는 일은 믿음으로지 율법으로가 아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열심을 다해 교회를 또 가정을 건사하는 일에 대한 나의 우려는 그래서였다. 혹시 지금의 간절함에 엉뚱한 길로 안내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나는 저에게 신랑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라고 말해주었다. 왠지 자꾸 저의 수고와 애씀이 그릇된 것을 붙들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문제를 파헤쳐야 해결책도 나오는 법인데, 앞서 자꾸 문제만 덮으려고 하면 그 해결이 늘 미온적이지 않겠나? 어디가 아픈 거 또는 당장 어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좀 가난해져도 괜찮다. 더 건강이 안 좋아져도 괜찮다.
그러는 동안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지금의 그 시간이 귀한 것이겠다. 그리 일러주다 내게 들려주는 말씀으로 여겨졌다. 나야말로 누구 못지않게 지긋지긋한 위인이 아니던가. 아들애 공항에 마중 가는 것보다 아픈 아이와 성경공부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것은 그만큼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저지하는 일에서였다. 하고 싶은 걸 하는 삶이 아니라 해야 하는 걸 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사 51:7).” 누가 뭐라 하든, 하물며 내 자신이 나에게 뭐라 하는 것까지도 그러려니 하고, 먼저 해야 할 일. 그 우선순위에 대해 늘 명심해야 할 거였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늘 바쁜 원인은 두서가 없어서이다. 다그치듯 살아서이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그러자면 어떤 원칙이 있는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6-18).” ‘항상’ 앞에 우린 어리둥절한 것이다. 기뻐할 수 없을 때, 감사할 게 없는데, 기도할 짬이 나지 않는데, 그러니 어쩐다? 무얼 주러 왔다 도로 가져가고, 뭘 주고 갔는데 그게 날 주려던 게 아니고, 이 혼잡스러운 생활을 어쩌면 좋을까?
부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우리는 늘 번잡스럽기 이를 데 없어 뭐 하나 돌아보면 해놓은 게 없는데도,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4).” 주가 이루시리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수밖에.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 기도를 부탁하고 또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게 목회가 아니겠나? 혼자 생각하였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시 119: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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