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1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편 118:28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말씀 앞에 가만히 마음을 다진다. 이번 주엔 아들이 들어오고, 그 전날엔 개학을 하여 중학교 아이들 수업이 있고, 해서 설교 원고부터 준비하였다. 주보는 미리 만들었다. 아니, 다음 주일 설교 원고도 초안을 잡아 본문을 뒤적거렸다. 성격이려니, 아침 일찍 글방으로 올라가 그리 서둘렀다. 여느 날과 같이 노인이 건너와 이런저런 말을 섞었고, 뒤이어 아이가 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였다. 아이는 몸살기운에 전날 장애인교통카드를 잃어버려 엄마의 핀잔을 들었다며 풀이 죽어 있었다.
선물이라며 하모니카를 건넸는데 아이엄마는 예의를 갖추느라 그 값을 내 것까지 챙겨 아이 편에 보내었다. 시무룩하니 아이는 자꾸 시선을 놓쳤다. 장애인단체에서 하는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로 했고, 저들과 함께 어울리기로 했다나. 그것으로 취업도 생각하는 일이었으니 잘 됐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런 아들을 보고 있을 홀어미의 마음이 오죽하겠나. 정상이 되기를 위해 그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를 다닌 것인데 오히려 아들은 장애인으로 굳혀져 그 무리에서 살아야 할 판이니.
도무지 기운이 없고 기분은 까부라져 있는 아이에게 점심을 먹으러가다 어깨에 둘러매는 가방을 하나 사주었다. 핸드폰에 지갑에 자꾸 흘리고 다니는 게 많아 그걸 한몫에 담아 둘러맬 수 있는 작은 것이었다. 이처럼 그리 자꾸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으니, 난들 어쩌겠나? 몸이 안 좋긴 안 좋은지 그 좋아라하는 당구도 마다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슬픔 같은 또는 안타까움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안 됐다는 말로 우리의 고단한 삶을 정리할 수 있겠나?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살아서 사는 날 동안 고단함은 필연이라, 그것이 다 죄로 인한 것이었으니. 아이엄마의 찌든 마음을 그저 안쓰러워할 뿐 어쩌겠나? 저는 저의 땀을 흘리는 것이고 나는 나의 땀을 흘리는 일이었으니, 이를 오늘 말씀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복되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이것을 숙명으로 여기든 운명으로 받아들이든 팔자소관으로 미루든 어쩌다 그리 된 그저 운 나쁜 결과로 치부하고 말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그것이 태곳적 처음 사람의 원죄로 인한 것이든 오늘을 살며 우리 개개인의 어리석음과 죄악된 소행으로 이뤄진 일이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그러니 어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중3 아이가 또 기분이 까부라져 책상에 엎드렸다. 전날과 달리 얘도 또 늘어진다. 조금 무얼 끄적거리더니 그만 가면 안 되냐고 물었다. 붙들어 어르고 달래야 할까? 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두었다.
어쩌겠나? 더는 연락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까지 마음이 닿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더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에 대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성령이 또 저들 하나하나와 함께 하실 것을, 나는 다만 이처럼 겨우 한두 명 내 곁에 두시는 이들로 이를 조용히 내 일로 받아 나의 손으로 힘쓸 뿐이다. 누가 어느 기독교 모임에서 누구와 어울려 어떤 신통력을 구사한다는 따위의 말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게 없었다. 아이엄마를 우리 교회로 보내지 않으시는 데야 내가 저이를 어찌 대할 수 없었다.
이렇듯 마음 쓰이는 게 더 고단한 일이기도 하여서, 신경이 쓰이니까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이 어려우니까 나는 자꾸 주의 이름을 부른다. 달리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답답하면서도 감사하였다. 고마워하면서도 부담스러워하는 저이에게 뭐라 이른들? 아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일일이 그러는 것이 또 저이에게 미안함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그래!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오늘 말씀이 내게 정답이다. 그러저러한 걸 일일이 마음 쓰며 어찌 내가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시 118:28).” 나의 하나님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아는 만큼 참고 또 견디며 조용할 수 있는 일이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말씀의 귀결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는 두신 날을 성실히 사는 일이고, 그 안에서 감사를 찬송을 올려드리는 일이다. 더는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대해서는, 그 아이들에 대한 마음으로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당장 내 곁에 두시는 아이 하나, 저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 일이 내게 넘치는 일이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이런 식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인이 건너와 창문에 썬팅을 해주겠단다. 건물 벽에 붙이는 상호 표지에 ‘하현글방’도 넣어주겠단다. 들어오는 입구도 살려주고, 이래저래 마음 쓰며 잘해주는 것에 대해 때론 이상하다가도 교회였구나, 하는 결론을 얻는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니까 안 믿는 이도 저리 신경 쓰고 이래저래 손을 거든다. 세입자인 주제에 주인이 찾아와 알아서 그리 해주겠다는 게 종종 희한하게 여겨지기도 할 정도이다. 고맙다는 소린데,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이 나는 늘 이처럼 실감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돈 들여 하는 게 없다. 블라인드부터 입간판에 이르기까지, 저처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는 것은 ‘착한 일’을 하게 하심인데, 이는 우리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이다. 달리 뭘 더 하겠나? 이제는 같은 층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우리 글방이 교회인 것을 안다. 인사를 건네고 지나는 말로 안부를 묻는 일에서도, 어떤 경외함이 느껴진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러려고 그리 의도하여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지는 일에 있어서는 나 역시 어리둥절한 일이기도 하여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저 나는 말씀을 자꾸 우선에 두려고 할 뿐이다. 누구에게 마음 쓰는 일을 내 의지에 따른 봉사이기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나 한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이는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그리 할 수 있는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저 아이를 어쩌겠나? 장애판정을 받고 기어이 저들 무리 가운데서 기술을 익히고 어디 취업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그것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삶이라. 우리는 살아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을 갖는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18:17).” 기죽지 않고, 마음 상하지 않고, 현실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 나는 이제 그리 확신한다. 나서서 순교를 하고, 봉사와 헌신으로 일생을 바치고, 교회를 위해 자기 전부를 내어주며 지분을 의뢰하는 일이 아니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처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주가 기뻐하시는 일이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그래서 나는 날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마주하는 누구와 어떤 말로든 행동으로든 말씀을 전하는 일이어서, 그것으로 ‘의의 열매’를 맺는 일이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 읽고 이해하고 산다. 아프면 아픈 대로 살고 힘들면 힘든 대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18:17).” 이것이 오늘 나의 하루를 더 연장하시는 주의 섭리이겠다.
결국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나는 가정예배로 읽은 말씀을 그리 이해하고 읽었다. 그러므로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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