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전서 4:16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우리의 주는 하늘에 계시다. 땅에 있지 않다. 하늘에 계신 주를 바람이 때론 애타다. 마치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우리의 간절함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왜냐하면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더는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간절함이 주의 은혜를 은혜하게 한다. 때론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 뭘 꼭 그렇게까지 하나, 한심하게 여길 때도 있다지만.
이 일로 나 자신을 살핀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사람들이 몰리고 그들 관심이 돈을 만드는 세상이라, 저마다 경쟁이 치열하다. 그렇듯 구하고 바라는 동안 ‘어떤 가르침’에 대하여는 다들 등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1-2).”
더는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지 않을 때, 세상에 널린 주인을 좇느라 정신이 팔리게 돼 있다. 그러자니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라고 말려야 하지만 실은 또 그런 게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었으니,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3).” 곧 어떤 일이나 무슨 수고에 따른 경계가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데 있어 우리의 마음이 그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데 주안점을 두게 하신다. 고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4-5).”
‘말씀과 기도’로 하면 거룩하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 한데 또 같은 말이 반복되듯이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면 돈이 된다. 이를 위해 끌리는 세상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휩쓸려갔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6).” 오늘에 나를 여기에 두시는 이유겠다.
중3 아이는 왕따다. ‘그럴만한 태도’로 고착되었다. 느닷없고 뜬금없으며 즉흥적이고 자기 기분에 따라 변덕을 부린다. 이를 제지하면 금세 토라져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부모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중1 아이 둘은 극과 극이다. 하나는 반듯하여 지나치고, 강박적으로 철저한데 그것은 ‘이혼당한’ 아이엄마의 영향이 크다. 어디서 흠이 잡힐까봐 아이의 자유를 박탈한다. 또 한 아이는 저능아 소릴 들을 정도로 아둔하다. 글방에 올 때마다 몇 층인가 묻고 시간 개념도 없다. 거기다 남자가 생겨 외모에 공들이고 뭐라 해도 소용이 없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6).” 말씀 앞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과연 저 아이들을 어찌 깨우쳐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게 할 수 있을까? 말씀은 저 하늘에 있는 것처럼 뜬금없다. 현실적이지 않아 난감하기까지 하다. 한데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오늘 주어진 일에 충실 하는 것이다.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주가 어찌 하시려나 기다리면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그러는 동안 묵묵히 또 지겨운 아이들을 마주대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변덕스러운 중3 아이를 다독이면서, 너무 지나치게 강박적인 중1 아이를 어르고, 한껏 멋을 부리고 늦게 와서 책상에 엎드려 잠드는 중1 아이를 다독이는 일. 얼음물을 내주고 사탕을 하나씩 까주면서라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7).” 오늘 말씀은 나를 연단하는 데 주목하게 하신다. 이는 경건에 이르는 길이다.
모처럼 초등학교 아이들이 수업을 와서 방학 동안에 있었던 일을 글로 썼다. 어르고 달래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일을 주관하시는 이가 계심을 알게 하는 일이 나의 사명이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8).” 그 어떤 노력보다 유익한 것은 상전의 눈짓을 바라며 그 명령을 따르는 종처럼 주를 바라는 일이다. 가장 확고부동한 진리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9).” 그러므로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게 없다는 말씀 앞에 두신 일을 주목한다.
‘저런 아이’를 어쩌나, 하고 내가 애태우고 염려할 게 아닌 것은,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일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10).” 덩달아 한심하기까지 한 아이들을 두고 나의 소망을 어디에 둘까? 못 견뎌하다 그보다 못한 나를 오늘에 세우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앞에 조용히 선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11).” 그러는 동안 나를 연단하시는 거였으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13).”
내가 요즘 피곤하다. 새삼 나의 신경증과 불안증을 여실히 느낀다. 차를 가지고 나간 아들 때문에 어디서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한다. 이를 다 주께 맡기고 의연하였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나를 신경쇠약 가운데 두심으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려는가보다. 아이들 수업 중에 아들은 그래도 어디에 무사히 도착했고 이제 뭘 할 것인지 알려주는 것인데,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오금이 저려 견딜 수가 없으니! 생각보다 일찍 내려와 같이 저녁을 먹고 나는 먼저 휑하니 들어왔다.
자꾸 어딜 가자 그러고, 무얼 하자 그러는데 그럴 때마다 어떤 두려움이 앞서는 일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주를 바라나이다. 그러는 동안 모든 여정은 나를 주 앞에 세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나는 나의 신경증으로 아이들을 더욱 안타까워한다. 예민하게 여긴다. 감정이 이입된다. 그러는 나를 아내는 이해할 수 없다고 혀를 끌끌 찬다. 그러니 어쩐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주가 이뤄 가실 것을 안다. 그 앎을 더욱 간절하게 하시려고 나를 홀로 두시기도 한다. 어떤 조바심이 또는 불안이 나를 더욱 주 앞에 세우는 것이다. 오히려 나의 의연함이 또는 담대함이 가루가 될까 두렵다. 아이들에 대한 막연함이 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주의 뜻을 멀리할까 두렵다. 나는 나의 두려움을 사랑한다. 힘에 겨워 쩔쩔매면서도 그래서 주를 찾는다.
너무 잘난 사회에서, 다들 너무 몰리고 쓸리며 휩쓸려 다니는 세상에서,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주는 내게 견고한 말뚝을 세우신 일이다. 가령 나에게 신경쇠약이 없었다면 단지 ‘저 아이들’을 상대하고 있었겠나? 더 나은 어떤 일을 구사하고 나름의 확신으로 외면하고 돌아서지 않았겠나? 내가 어떻게 하루 종일 아들의 행적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나?
그럼에도 내 안에 주가 계심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이 비루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주의 일에 힘쓰게 하시려고, 내게 두신 오늘을 감사함으로 받아 버릴 게 없이 하는 게 순종이겠다. 말은 이렇게 해도, 죽을 것처럼 힘들다. 눈물이 와락 솟구칠 땐 어찌 주체할 길이 없다. 두려움에도 평소에 먹는 양의 약으로 버티면서, 주의 이름을 되뇌는 일이 내게는 노동이라. 이 노동이 기도가 된다. 이와 같은 수고로 인해 주를 더욱 바란다.
주를 떠나 주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여실히 붙들어 세워 알게 하심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한 날 한 날의 수고가 곤하여, 나는 내가 힘에 겨워 주를 바란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사역이 될 수 있겠나만, 것도 주의 것이라. 나는 다만 주신 나를 가지고,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곧 이로써 주를 나타내는 일이었으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 오늘 말씀은 새삼 나의 갈 길을 확신케 하신다. 그러니 내가 어디를 향해 주를 바랄까?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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