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전봉석 2018. 9. 5. 07:05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디모데전서 2:1-2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21:5-6

 

 

 

나는 내가 불안장애에 시달린다는 걸 이제 새삼 깨달은 것 같다. 이래도 불안, 저래도 불안 어찌 주체할 수가 없어 쩔쩔매는 지경이라, 자동차 페달도 고칠 겸 송도신도시 쪽으로 나가야 했다. 모처럼 아내도 일찍 일어나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 옆자리에 앉은 나는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극도의 긴장상태가 되었다. 아이의 서툰 운전도 그렇고, 늘 회피하며 미루던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고. 결국 그쪽 어디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던 것이, 도로 우리 동네로 와서야 안도하였다.

 

오후께는 아들이 차를 몰고 아내를 데리고 처가에 인사를 갔다. 물론 나는 동승을 하지 않았다. 도로도 꽉 막힐 시간이었고, 중3 아이 수업을 핑계로 그리하였다. 것도 그런 게 마침 중3 아이엄마가 선물로 웬 떡을 들고 왔다. 아이의 변화가 어미 마음에는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그에 앞서 신대원 동기의 전화가 있었고, 무슨 일로 어려워하는 마음이 주로 나와 같은 증세여서 길게 한숨을 쉬며 주의 이름을 되뇄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할 수 있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있어 귀하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우리를 엄습한다. 동기 목사의 경우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아이 셋을 두고 췌장암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틀이 멀다하고 기도제목에 올라온다. 전화를 한 동기는 발목에 어떤 기형이 생겨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유난히 유약한 감성도 있다. 왜 그러냐고 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다그쳐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마음을 편히 가져, 이겨내야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하는 따위의 조언도 허사다.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해도 궁지에 몰린 경우라, 어쩌면 우리가 이 땅을 죄인으로 사는 동안 삶을 최전선에서 맞닥뜨리는 일들이 아닐까? 특히 불안증에 대해 나는 그리 이해한다. 더는 나에게도 다그치지 않는다. 아내는 꿈이 나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보는 것이고, 아들은 이참에 필리핀에도 와야지? 하고 몰아세운다.

 

누군 죽음의 경계에 서서 주를 찾고 누구는 아직 그런 게 실감이 안 돼 막연하다. 누군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지는 것으로 운신의 폭을 느끼고 아직 젊거나 어린 아이들은 와 닿지 않는 소리여서 실감이 없다. 그럼에도 모두 같은 자리를 지나야 하는 일이었으니, 오늘 말씀은 첫째로 권한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는 것이다. 주께 바라고 저를 위하여 아룀으로 감사를 하라는 것.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 함은 저들의 행정처리가 우리의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이 단지 한 끼 식사를 두고 바라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땅을 일구고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농작물을 거두는 손길과 이를 유통하여 여러 경로를 거쳐 내가 그 값을 치르고 사는 모든 일에 적용이 되는 기도다. 이에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주가 아니시면 그 복잡하고 어지러운 순환관계를 어찌 감당하며 치르고 살까?

 

단지 ‘너와 나’의 관계란 없다. 가령 중3 아이를 마주대하는 일은 그 어미의 구구한 삶의 질곡으로 이어져온 아이의 유년시절까지 마주하는 일이다. 그 가족의 내력은 물론 저를 둘러싸고 왔던 온갖 친구와 이웃과 별의 별 사람들까지 다들 한데 어우러져 빚어지고 뭉그러진 아이의 내면을 그 기질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이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의 소원’을 두루 채우시고 만족시키시는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다 우연히 그렇고 그런 관계란 없는 일이다. 그러기까지 오늘에 이르는 동안 우리 자신도 미처 모르는 순간순간까지도 주께서 만족하게 하심이니.

 

굳이 그럴 거 없이 내가 운전하면 더 안전할 거 같은데, 나는 아이 곁에서 불안해하며 그리 생각하였다. 복잡하게 그럴 거 없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한순간에 다 이루셔도 될 일인데, 우리들로 하여금 쟁기질을 하고 땅을 일궈 씨앗을 뿌리고 낟알과 과일을 재배하고 수확하게 하시는 일이어서,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시 147:13-15).” 그리하여 말씀을 듣는다.

 

우리로 그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로 세우신다. 곧 오늘 나의 이 한 날 한 날의 수고는, 그 불안으로 힘에 겨운 순간에도 주가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는 물론 나를 통하여 아들에게 또는 아이들에게, 아내에게 또는 어느 아이엄마에게, ‘어떤’ 의도하시는 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두루 관여하시고 주관하시는 이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렇지!

 

개개인이 안고 사는 크고 작은 다사다난함에 대하여,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부름이다.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소명이다. 이는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는 일이다. 사역이다. 돌아와 비로소 안도할 때에야 알았다. 내가 차 안에서 내내 손에 꼭 쥐고 있던 휴지뭉치가 땀에 배여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까지도 주의 일에 쓰임을 받을까? 곧 ‘무엇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이웃과 주변에 두신 이들에게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일이 사명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왕성한 의욕은 과욕이 된다. 누구보다 강단 있고 자신감 있는 추진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으로 탈진할 수 있다. 스스로 자족하는 마음으로 타협하면 곧이어 자기혐오에 빠질 수 있고, 남에 대한 어설픈 배려가 공명심을 부풀린다. 주의 뜻을 운운하던 마음이 하나님을 이용하려 들기 십상이고,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금을 탈루하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변칙을 감수하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강구하는 자리에 빠져 결국 남은 판단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하여진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분주함과 늘 시달리듯 바쁜 일정과 분에 겨운 고단함으로 신음하는 것이다. 이를 오늘 말씀은 경계하신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 121:5-6).” 결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게 사명이 아니다. 알아서 살라는 소리가 말씀에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주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 그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이의 것임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 굽실거리며 두리번거리며 누구, 어디, 귀인을 찾아 헤매지만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146:3).”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시다. 곧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사 40:23).” 결단코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손에 쟁기를 들게 하셨다. 이마에 땀을 흘리게 하셨다. 그럼에도 땅은 엉겅퀴를 내고 수확은 적다. 우리의 만족은 땅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 며칠 아들 녀석과 같이 다니면서 속 터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부모가 하는 게 더 낫고 빠르고 깔끔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맡겨서 그 일을 통해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익히고 책임감을 기르게 하는 것이 부모인 것처럼, 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를 새삼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이런 소모적인 고달픔과 불안과 근심과 걱정까지도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비로소 아는 날까지 오늘의 이와 같은 일상은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시 147:13-15).” 이 모든 일의 그리되어짐이 곧 주의 긍휼하심을 알게 한다. 앎으로 주를 더욱 경외하게 한다. 살아서 이 땅의 삶으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도움으로 삼게 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