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1:19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
주께 맡기지 않고 어찌 살까? 과연 나의 부모는 그 속이 어떠하셨을까? 어떤 우려와 염려도 온전히 주께 맡기지 못하였을 때 나타나는 안달이다. 나는 우황청심환까지 먹었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아 초조하였다. 이제 장성하였으니, 운전도 하고 어딜 나다니며 누굴 만나고 무슨 일도 추진하는 것이 당연할 것인데, 나는 병적으로 불안에 시달렸다. 괜찮다, 의연하자 하고 스스로 자신을 다독여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가령 초보운전이라 도로주행이나 주차연습을 같이 해주자니 내가 더 불안해서 죽을 것 같고, 혼자서 하라고 두자니 것도 미칠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초조함으로 시달리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음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녀석은 한술 더 떠서 억수로 비가 퍼붓는데 서울까지 가서 누나를 데려오겠다고 하였다. 무슨 일에 어찌 누구와 사업을 도모하는 일에서도 현금으로 얼마를 어디서 받아 어떻게 분산하고 이를 어찌 필리핀으로 가져갈지, 서로 궁리하는 내용도 마뜩치가 않았다.
아내는 아들보다 나를 더 염려하였고, 나는 내내 불안으로 떨며 아이들을 기다렸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기도가 말이 좋아 기도지, 기도밖에는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장 절박한 자리였다. 생의 최전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누웠다가 앉았다가, 누구에게 괜히 전화를 하였다가, 책을 끌어다 읽기도 하였다가, 그러자니 하지마라 할 수도 없고 의연하게 그러려니 하고 모르는 체 할 수도 없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속내를 내비치자,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맡겨두고 기도하는 수밖에! 하시는 것이다. 이것도 일이라. 우리에게 맡기신 삶의 궁극적인 형태가 다스리라는 것과 지키라는 것과 정복하라는 것이었듯이,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주의 명령이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충만하라는 것은 성장하는 의미다. 발전시켜 세워가는 일이다. 다스리라 하는 명령은 땅이 가시덤불을 내기 전부터의 명령이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8-19).” 이를 다스리지 못하면 다스림을 당할 수밖에는 없는 일이 되었다. 정복하라는 의미는 그만큼의 의지적인 참여를 일컫는다. 막연히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수동적인 관여가 아니다. 적극적이며 성실함으로 임하는 자세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러하였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 4, 7).” 적극적인 개입으로의 정복이다. 그 가운데 다스림의 권세가 나온다. 모든 질서의 충만하심으로 드러내준다. 마침 책을 끌어다 읽은 내용이 팀 켈러의 <일과 영성>이었으니 것도 절묘하였다.
아들 녀석의 초보운전으로 마음이 불안에 감싸였을 때,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의 일처리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었다니! 오늘 말씀은 쐬기를 박는 듯하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믿음이 굳건하다는 건 의연하여 흔들림이 없는 삶이 아니다. 스스로 무장하여 ‘난 할 수 있다.’ 하는 따위의 각오와 다짐도 아니다. 다만 내가 ‘바람에 나는 겨’와 다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말씀을 붙들고 서는 기도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 일은 마치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나 역시 바람에 흔들리고 같이 까부라져 죽을 것처럼 요동하나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 이내 바람이 자고 고요한 쉼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이내 그 뿌리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였다는 것을 안다. 다들 무사히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릴 때의 평안함이라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왜 그래야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다. 유리관 속에 모형이 아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그러므로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은혜였다. 은혜란 어떤 완전한 것이 저절로 뚝딱 주어져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그럴 거면 하나님이 그냥 하시는 게 더 나았다. 아니면 왜 우리에게 정복하라, 다스리라, 충만하라 하셨겠나?
다른 피조물인 식물과 동물은 그냥 충만하고 번성하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으로는 다스려야 하고 지켜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 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하나님의 일을 관여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불안장애로 쩔쩔매며 속이 볶이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감사를 배웠다. 어딜 같이 가고 싶은데 몸은 아프고, 무얼 같이 하고 싶은데 마음은 불안이 먼저 엄습하였고,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맡겨두어야 하는데 안달복달 끌탕이라.
나는 마음이 어려운 사연을 주께 풀어놓는다. ‘아이가 하는 일’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기를 바라신다. 딸애가 사귀는 누구에 대해서도, 다들 자라 이 일 저 일 일구어가는 일들에 대해서도, ‘그 일’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나의 조바심과 초조함은 나를 병적으로 휘두르는 것이다. 그러다 가만히, 더는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그 일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좀 우습지만 나는 이렇듯 빙충맞게 주의 사랑을 체득하는 중이다. 책을 보면 누군 참 의연하니 잘도 이루어가는 일 같은데, 나는 솔직히 글로 옮겨 적기에도 민망하게 안달복달, 지지고 볶고 내 속은 끌탕을 떨어 이를 진정시키려고 먹은 우황청심환 때문에 위경련이 오는 판국이니! 살 수가 없다. 주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기도가 아니면 할 것이 없다. 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빙충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주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견딜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는 자가 무엇으로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고 번성하며 충만할 수 있을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주의 일에 주목하고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란 오랜 기다림과 참음밖에는 달리 더 나은 길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래서 다행인지 또는 불행인지, 주밖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기도뿐이라. 도와두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주의 이름을 되뇌는 것이다. 단지 이 땅의 소망으로 전부가 아니어서 말이다.
결국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6-8).” 이를 알게 아심이다. 내가 새삼 해를 지어야 하고 달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궁창을 가르고 하늘과 땅을 나누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이 다 지어놓으신 땅에 살며, 비로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감탄하는 게 일이었다. 기도로 놀람으로 찬송이 끊이지 않는 일 말이다.
충실한 정원사와 같이 이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그것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게 나의 복이었다. 이를 내게 알게 하는 것은 어느 멋진 글귀도 아니고, 누구의 일품 있는 말귀도 아니고, 혹은 남들보다 뛰어난 신앙과 믿음으로 의연하고 의젓함에서 비롯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어린아이 같이 주의 품이 아니면 평안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주 안에서만 비로소 평안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고 속은 볶이고 몸은 불편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 가운데서 참 진리 하나를 깨달았으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0-13).” 오늘 말씀을 주시려고! 내가 무어라고 누굴 위해 기도하고, 위하여 마음을 기울이게 하셨는가 하였더니 그게 맡기신 직분, 일이었다. 곧 오늘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정복하여 다스리고 충만하여야 하는 일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나 같은 이로 무슨 일을 하시려고 이러시는가, 하다가도 이 일이 내 일이었으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 나 같이 찌질하고 빙충이 같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이를 일깨워 주의 일하심을 주목하게 하시는 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
결국 이것도 쓸모가 있어 누구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고, 주밖에 다른 도움이 없으심을 모두에게 알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7).” 결국 이 믿음이 파선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고! 오늘도 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나 그 뿌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18-19).”
이에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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