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12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주가 지키신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난도 질병도 우리를 주눅 들게 할 수 없다. 믿고 의탁할 수 있는 일이 복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영원 전부터 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은혜다.
문득 오늘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감사한다. 이는 막연하여서 그리 느끼는 게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일이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잘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 그런 것이어서 말이다.
먼저는 은혜대로 하심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 그렇듯 힘에 겨워 죽을 지경인데도,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9).” 나는 이것보다 더 귀한 은혜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맡기신 교회’와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과 ‘우리로 감당하게 하시는 현실’을 두고 씨름할 따름이다. 어떤 의미에서 씨름이라 표현하는 일도 부족한 것이, 내가 특별히 하는 게 없어서 말이다. 이는 곧 택하심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 목적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일이다.
그저 한 아이, 내 앞에 두신 일,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무던할 수 있는 것. 아이는 여느 날보다 일찍 예배에 왔고 우리는 같이 찬송을 오래 여러 곡 불렀다. 늘 마음에 얹힌 아이들을 생각하였고 나와야 할 그들을 두고 주께 고하였다. 같이 점심을 먹으며 월요일에 성경공부를 할 수 없다는 말을 아이에게 설명하였는데, 오후께 어머니가 편찮아서 밤에 가려고 했던 일이 취소되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오라고 문자를 했더니, ‘네 사랑해요 목사님’ 하는 답이 돌아왔을 때의 어떤 감격이라니!
이제는 지나가고 스쳐버린 열 명의 아이들보다 곁에 두신 이 한 아이가 오늘 내게 두신 사명이고 일이었다. 이처럼 끊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리하여 주의 사랑을 배움이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지독한 실제였다.
오늘 말씀은 이를 불러들인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우리의 확신이 이 길을 가게 한다. 때론 힘에 겨워 아무런 보람도 기대도 희망도 없는 것 같은데도 그때마다 불러 세워 말씀 앞에 굳건하게 하신다. 곧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당장 그 거둠이 내 생의 것이 아니라 해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 그렇게 ‘허다한 증인’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알게 하신다.
그런 확신이 무너지려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내가 어찌 죄 사함을 받았는지 돌아보게 하신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곁에 두신 이 아이 하나를 위해서도 몇 장의 설교 원고와 일주일에 몇 번의 만남과 또 했던 말을 다시 수없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곧 내가 의를 입었음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저 죽어 마땅할 죄인이었는데, 오늘도 내게 허락하시는 감사가 또 용서가 귀하다. 나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었으니, 거창하고 인위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럼에도’ 감사하고 주를 바라는 마음이겠다. ‘그런데도’ 주를 의지하며 주 앞에 나아오는 이와 같은 현실이겠다.
그런데 또 신기한 건 다 같이 느끼는 마음이라. 가령 아이에 대해 아내도 딸애도 아들도 같이 그처럼 마음을 쓴다. 우리 곁에 두신 ‘아직은’ 주를 영접하지 않은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또한 똑같은 마음이라 것도 희한하였다. 내가 저 애랑 무슨 상관인가? 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이 내가 나 같지 않은 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결코 내가 아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저 애 때문에 마음 쓰고 시간 내고 돈 들여 무얼 거저 바라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리 되는 마음’에 대하여 종종 낯설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내가 위하고 애써 그리 수고하는 일이라면 마땅히 바랄 어떤 기대나 희망도 있을 텐데, 이미 족한 무엇,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그러는 나는 누구였나?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 죽었던 나이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바라고 의지하며 내 멋에 겨워 사람을 판단하고 경계하며 다만 자기를 사랑하던 자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다? 오늘 말씀에서 이를 확인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어떠하든, 어쨌든, 주신 바, 두신 바 오늘 이 한 날의 삶을 다하는 것. 그리하여 성경이 바라시는 게 있었으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2).”
오후께 딸애가 운전을 하고 아들이 옆에 앉고 우리 부부는 뒤에 앉아 평소에 가기 어려워하던 마트를 가고, 같이 영화도 보았다. 그러는 동안 문득 드는 생각이 내게 허락하시는 오늘의 은혜와 평강이 주의 것이라.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그리 여겨주시고 또는 내게 있게 하시는 일이어서, 그 풍성하심 앞에 감사하였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 앞에 나는 그저 평강하였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께서 지키실 마음이고 생각이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민망하고 송구한 일이겠으나, 자잘하고 사소한 오늘의 것으로 감사하였다. 가령 그 넓은 마트를 같이 걷다 몇 번을 힘들어 의자에 앉을 때였다. 누가 앞으로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나갔다. 생긴 모양이 간소하고 편리해보이자, 아빠도 저걸 하나 살까? 하는 아들의 말에 뭉클하였다. 그것은 어떤 측은지심 때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는 마음이다.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는 것, 살아서 삶으로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18:17).” 이는 이것까지도 내 생에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다. 뜻을 다하는 마음이란 어떤 거창한 무엇을 새로 하는 게 아니다. 두신 날을 사는 일이다. 주신 몸으로 맡기신 날을 사는 일에서부터 보내시고 붙이시는 한 영혼을 안고 씨름하는 일에까지.
영생은 이미 시작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주신 날을 묵묵히 사는 게 은사라. 그리하여 오늘 말씀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 이를 위해 오늘도 나의 하루를 새로 더하신다. 아버지 댁에 가서 오늘은 못할 것 같던 아이와의 성경공부를 그대로 하자고 했을 때, ‘네 사랑해요 목사님’ 하는 그 대답이 단지 ‘아픈 아이’의 생각 없는 마음이었겠나?
주가 더하시는 마음이다. 일이다. 한 날이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2).” 새삼 오늘 말씀이 귀하다. 고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3-14).” 이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말씀이 약속이다.
곧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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