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14-15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가을이었다. 파란하늘이 찢어질 듯 팽팽하였고 선명한 햇살은 눈이 부셨다. 수면 위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선선하였고 일렁이는 물결 위로 수천수만 개의 하늘이, 햇살이, 바람이 모여들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하였다. 모처럼 낚싯대를 한 대 던져두고 앉아있으려니까, 가을이어서. 혹은 나이가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났다. 울컥, 하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껴지는 울음이었다. 멀찍이 둘러앉은 낚시꾼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마뜩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 서러웠다. 아니, 두려움이다. 나는 내가 살아왔던 날들을 생각하며 안쓰럽기도 하고 측은한 것 같기도 하여, 그리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인가? 다시 마음을 돌려먹으려 해도. 저 혼자 부는 바람에는 길이 없었다. 수면 위를 일렁거리는 물살의 숱한 뒤채임에 눈이 아렸다. 새벽에 핸드폰을 들고 편지글을 썼을 중3 아이를 생각하고, 저 혼자 보내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힘에 겨워하는 아픈 아이를 생각하였다. 자꾸 눈물이 났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오늘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으려고 하는 삶도, 그러려니 하고 사는 삶도 고단한 터이니. 내가 살아왔던 세상을 저 아이들이 다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의 서러움이었다. 안타까움이었고 답답함이었다. 주님의 슬픔도 그러하셨던 걸까?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기어이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죄의 결과이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었다.
오후께 아들이 차를 쓴다고 해서 일찍 철수하였다. 글방에 들러 아들과 만나고 새로 약을 받으러 병원엘 갔다. 의사는 좀 어떠신가 물었고 나는 늘 같은 소리여서 적당히 대답하였다. 그러다 문득 울음이 올라오고 심장이 뛰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자 무슨 안정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그는 효능에 대해 설명하였고 나는 그러려니 하고 들었다. 교회로 돌아오자 온 몸이 나른하였다. 모처럼 서너 마리 고기를 잡아서 그런가, 어깨도 묵지근한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럼에도 그 모든 우리의 어리석음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나도 이제 안다. 주는 주의 미쁘신 이름을 위하여도 우리의 그릇됨도 선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다만 그러는 동안 내가 돌아왔던 날의 고달픔이 서러워서, 그 길을 또 아들이 걸아야 하는 것이어서, 그러는 동안 사람을 만나고 일에 시달리고 세파에 찌들어야 하는 날들이 안쓰러워서. 눈물은 저 혼자 주책을 떨었다.
약속 때문에 늦은 아들을 빼고 가정예배를 드리다, 그런 나의 마음을 말하는데 또 눈물이 퍽, 하고 쏟아졌다. 마치 오랫동안 참았던 아이의 서러움처럼 엉엉거리고 울자 아내와 딸애도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안다. 개망나니만도 못한 나를 오늘에 세우신 이다.
다들 나름의 서러움이 또한 구슬픔이 왜 없겠나? 마침 오후께 동기 전도사 내외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통화하게 되었고, 어떻게 할까 하여 다시 전임을 구하려 하고 또는 어디 시골 교회 목회를 생각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저 혼자 분주한 것이다. 저 혼자 길 없이 길을 내어 파란하늘을 미끄러지듯 헤엄치던 바람의 길을 생각하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그 길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한 날의 고단함이 내 마음을 흔드는 것 같았다.
단연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 그저 내가 하는 일은 염려뿐이라. 나의 이 사소한 염려와 염려가 도리어 주를 더욱 바라게도 하는 일이었으니. 아들의 생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하실 것을 믿는다. 도무지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우리 중3 아이의 영혼도 주가 사랑하신다.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그리 흔들리었다.
흔들림으로 나는 살았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다른 그 어떤 약속보다 진귀하다. 전심으로 돌아오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내가 저 아이를 또 어떤 이를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아들이라 해서 대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문득 아내의 괴짜 같은 말이 명답이었다. 내가 신경증으로 불안을 겪는 게 낫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또 풍요를 느낀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전에는 내가 다 아는 줄 알고 덤비던 세상에서 이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한다. 구할 수 있는 마음이어서 감사하였다. 가령 내가 중3 아이를 생각하는 일이 매일매일 ‘바람이 불고 해가 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그렇지. 나는 나의 그 사소함으로 주께 구하고 또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아내는 입을 삐쭉거리며 왜 저 아이 때문에 그렇게까지 마음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고, 나도 내가 왜 ‘저런 아이’ 문제로까지 이처럼 애달아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답답하였다. 그럼에도 두시는 마음이라. 눈물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정말로 늙는다는 일이어서 호르몬 변화가 어쩌고 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래서 그 눈물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일이었다.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인자와 자비하심을 바랄 뿐. 우리로 우리가 돌이켜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찌 산들 주 앞에 선하였을까?
오히려 오늘의 이 눈물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마치 엄마 품에 안겨 비로소 평안을 누리는 아이처럼,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131:2).” 생의 이 고약한 농간 앞에서도 언제든 피할 수 있는 복된 존재였으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묵묵히 오늘에 두신 이 모든 것을 주가 아심이다. 곧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으니, 내가 안달복달 속 끓일 일 아니다. 눈물이 나면 눈물이 나는 대로, 마음이 저리고 답답하면 또한 그러는 대로, 다만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고. 이내 우리의 어리석음이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12).”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것이 경건한 삶으로의 길이었으니.
‘아픈 아이’는 오늘부터 일주일간 직업훈련을 받으러 간다.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것이니 나름 안심이 되기는 한데, 녀석은 그래도 들떠서 식전부터 카톡을 하고 잘 다녀오겠다며 여러 번 인사를 하였다. 이런저런 당부를 하다 가슴이 또 먹먹하여지는 것은 주가 두시는 마음이겠거니. 그것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생각한다. 모두의 삶이 참 고약할 따름이다가도 그것으로 비로소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었으니 어쩌겠나.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내 마음에 심어진 말씀으로 산다. 이 귀한 것을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씀을 심는 일이다. 저 아이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같이 읽는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중3 아이를 붙들고 내가 들려줄 말이 무엇이겠나? 초딩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게 말씀 말고 무엇이겠나? 저 아픈 아이에게도, 우리 아들에게도 말씀뿐이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17).” 말씀이 말씀으로 알아서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도 갖추게 하실 것이다.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곧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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