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모데후서 4:5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편 129:3-4
새벽에 슬그머니 일어나 응급실로 갔다. 위경련이다. 그럴 줄 알았다. 내 스스로 안달을 부려대는 통에 당해낼 재간이 있겠나. 아이가 직업훈련을 받기 위해 다음 주 수요일에나 온다고 하였으니, 건 다행이다 싶었다. 보면 다 자기를 들들 볶으며 산다. 별 수 있겠나. 주께 맡기지 못하는 만큼은 짊어지고 가는 수밖에. 그럴 때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떠오른다. 기독도의 삶이어서 더욱 애간장을 녹이는 건 필연이겠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그런 원리를 알게 하셨다. 환난이 있으니 기도를 하는 것이고 기도를 하자면 소망을 붙들어야 할 터인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우리가 내는 소리가 마치 트라이앵글 같지 않은가. 다 같은 소리인 것 같은데 그 위치가 다르고 그럼에도 어느 것 하나 별개의 것이 아닐 터이니. 그래 맞다. 어쩌면 성도로 사는 일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일보다 괴롭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다. 오히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일이 순탄한 것이라 한다면 그게 더 위험한 일이겠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데 유독 우리들만 주의하고 또 조심하는 게 있어서이다. 그러자니 우리 안에 회의와 갈등이 오죽하겠나.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는 다음에야. 부대낌은 훈련이면서 증표인 셈이다. 그럼에도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우리에겐 소망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있지 않나. 속이 뒤집어져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프고 식은땀이 흐르며 속은 울렁거리고. 그러면서도 적당하여서 응급실로 내가 운전해서 가고, 링거를 맞고 가만히 누워있자니 이게 또 긍휼하심이라. 속을 끓이고 저 혼자 끌탕을 지기는 내게 몸이 그만 신호를 보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새삼 깨닫게 하시는 일, 내가 사는 일이 내가 사는 게 아니었다는 것.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므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더욱 간절히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2-3).” 자꾸 마음을 쓰는 일이 실은 이 땅의 것이 아니던가. 위에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생각하느라 끌탕이니 몸이 죽을 맛이라.
그러는 내게 성경은 일러,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곧 오늘 내게 두시는 이런저런 염려와 몸의 고통과 생활의 질고와 자식에 대한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들이 실은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훈련이 되고 있었으니,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하고 들던 회의가 내 등에 고랑을 내는 삶의 질고로 깨닫는 바가 큰 것이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3-4).” 악인이며 나의 원수인데 저런 것까지도 주는 의로우사 우리의 직무를 더욱 감당할 수 있는 원리로 삼으신다. 속은 볶이고 저 혼자 씨름하는 것 같았는데, 그러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 순간에도 같이 하시고 함께 하시는가를 더욱 확연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그렇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 이는 우리 하나님은 어떠하든 선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이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직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5).” 말씀과 기도로 ‘그런 것까지도’ 거룩하여진다. 마음 쓰고 애태우고 힘에 겨워 몸이 먼저 호소하는 이 시점에 말씀은 새롭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그것으로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아들 때문에 속을 끓이던 게, 저 아이들이 살아야 할 이 땅의 여러 우여곡절을 안타까워하다가도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결국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가를 새삼 알게 하시는 일이다. 그러게. 어려움을 통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된다는 이 이율배반적인 진리 앞에 두 손을 든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6-17).”
어려움이 아니면 언제 또 그처럼 주를 간절히 바라던 적이 있었던가? 사람 참 난처한 일이라 좋을 땐 어쩜 그렇게 빨리 해이해지는지. 마치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게 평안할 줄 아는 모양인데, 아뿔싸. 나의 연약함으로 간절함을 배우는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결코 나는 완전할 수 없고 뭘 해도 선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내가 누구보다 나은 게 있어서 선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주께 간구할 수 있는 것이 선이었다. 그러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환난을 두시었고 그런 가운데 새 힘을 잃지 않게 하시려고 소망을 더하시는 거였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그리하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119:116).” 비록 이 땅에 사는 일이 내 등에 밭고랑을 내는 일처럼 고달프다 해도,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그래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그런 와중에도 내가 누굴, 저 아이를, 어떤 이를 위해 맡기신 직무를 다 할 수 있는 것이었겠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나의 고단한 날들을 돌아보면 그게 다 은총이었다. 긍휼하심이었다. 사랑이었다. 이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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