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전봉석 2018. 9. 15. 07:15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2:11-14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누가 ‘어떤 것’을 마음에 두고 기도한다 할 때 하나님이 ‘어찌 응답하셨다.’ 또는 ‘어떤 마음을 주셨다.’ 하는데 나는 그런 확신을 경계한다. 누가 찬양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하고, 누가 깊은 기도로 평안을 얻었다고 할 때, 나는 또한 그와 같은 체험을 경계한다. 이를 무시하거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아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일상에서 일상으로 찾아오신다. 때론 뜬금없는 것 같으나 그 또한 우리의 일상에서다.

 

누가 ‘무슨 일’을 두고 하나님께 묻고 깊은 기도나 충만한 찬양으로 마음을 기울일 때, 내가 그와 같은 수고를 경계하는 이유는 그럴수록 자기 안의 소리, 낭만적인 생각, 더러 공상에 젖어보곤 하였던 마음이 먼저 들썽거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일상에 계신다. 곧 오늘 우리에게 두신, 지지고 볶고 아웅다웅 갈팡질팡하는 이 모든 현실의 것이 주의 것이라는 데 확신을 갖는다면 ‘이게 아닌데?’ 싶은 것까지도 하나님은 의도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는 소리다.

 

누가 석 달을 쉬기로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저는 엘리트다. 어디든 지원하면 굴지의 회사들이 손을 잡을 정도로 실력이 있다. 내가 알기로 저의 학벌은 끝내준다. 아무튼 그런 그가 봄이 지나 여름을 넘기고 가을이 다가오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찾느라’ 일을 미루고 있었다. 누군 또 새로운 사역을 모색하고 있었고, 누군 여전히 ‘이 길이 아닌가?’ 하는 갈등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사실 직접적으로 저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다. 그런 이들의 특징은 자기에게 동조하는 사람을 찾는다.

 

일상이 주가 맡기신 일이다. 주의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주가 엎으시는데 그런 경우는 다소 물리적인 힘이 동원된다. 배의 방향을 급히 변경하기 위해서는 조타수의 무리한 수고가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엄연히 배는 물 위에 있다. 믿음의 기본 원리는 받아들이는 것이지 묻고 이의를 달고 자신의 의문점을 말끔히 해소하는 게 아니다. 먼저는 받아들여야 믿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믿음처럼 단호하고 단도직입적인 게 있을까? 믿음으로 사랑을 받는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사랑하는 일은 고되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아니다. 때론 죽어라 하고 또 견디는 것이다. 싫고 좋고의 차원이 아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는 게 가능한 것은 사랑 때문이다. 내가 믿는 확신이 아니라 주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아는 일이다. 그 ‘사랑의 갈등’은 이 세상을 사는 날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이는 마냥 좋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내 안에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그러느라 드는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달프고 힘에 겹다. 이를 통해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새 힘을 얻게 하시는데,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어찌 이 비현실적인 가운데서도 참아낼 수 있을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그래서이다. 곧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의도는 이와 같이 분명하시다(딛 2:11-14).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깨끗함으로 속량함을 받은. 불법에서 건짐 받은.

 

말씀을 가만히 되씹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또 이겨내는 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내가 아들딸을 위해 기도한 것도 그것이었다. 아직 젊고 또 건강하여서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이 무한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음을 늘 명심하게 하시기를. 일 년 후 이 년 후를 가늠하며 마치 맡겨둔 생을 사는 것처럼 굴지 않기를. 오늘 하루,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알고 날마다 매순간의 은혜로 살기를. 그것을 바라고 구하기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오늘 아침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 역시 주 앞에 구한다. 묵묵히 무던함으로 주가 허락하시는 날 동안을 온전히 살게 하시기를. 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묻는다면 책상 정돈부터 권하겠다. 기도도 좋고 찬송도 귀한 일이나 개수대에 설거지부터 하라고 일러주고 싶다. 우리의 대단한 착각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귀히 쓰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일이다.

 

나는 모처럼 와서 있는 아들 앞에서도 매주 늘 똑같이 하던, 금요일이면 교회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이처럼 아침마다 주 앞에 앉아 말씀을 끌어다 묵상하고 그 내용을 글로 쓰는 일을 계속하였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늘 그러는 일이어서, 나의 이 사소함은 아침이 되면 날이 밝고 바람이 불고 또 저녁이 되면 해가 지는 일처럼 늘 같은 일인 것 같으나 새롭다. 나의 이 새로움은 주 앞에 설 때마다 감사로 드려진다.

 

어디 멀리 좀 갔다 올까? 뭐라도 할까? 하던 하루였다. 그러나 모처럼 아들과 목욕이나 갔다. 나보다 이제 두 배는 더 널찍한 등을 밀어주고, 커다란 키에 다 자란 아이를 보다 울컥, 또 감사하였다. 마치 내가 뭘 꼭 해야 한다는 건 착각일 뿐이다. 저 아이를 내가 자라게 한 게 없고 저만치 크게 한 일이 없다. 이런저런 구상하는 일을 이야기할 때 더는 뭐라 토를 달지 않는다. 나의 생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저 아이의 생에도 함께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기도는 간절하여서 어느새 보름이 다 지나 오늘이면 출국을 해야 하는 일처럼 우리의 인생도 어쩌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는 것이어서 부디 허튼 길로 가지 않기를. 먼 길을 돌지 않게 하시기를. 굳이 그러해야 한다면 그 길까지도 주께서 선히 다루시고 이루시기를. 전날에 아이가 없을 때 펑펑 울어서 더는 눈물을 참았다. 아내와 딸애야 내가 찔찔한 걸 늘 보고 사는 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대신 주께 구하였다. 한참 때 젊을 때 아직 기력이 왕성하여 주의 일 하기 참 좋을 때 부디 이 아이들의 쓰임이 주의 것이기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주를 따르는 일이 우리 일상으로 주어진 과제라. 책상을 정돈하고 설거지를 하고, 누가 길을 물으면 공손히 대답하고 저에게 양보하며,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주의 얼굴과 음성으로 하는 것처럼 하는 날들의 소소함이 귀한 일이었다. 곧 누가 나를 보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아 주를 바랄 수 있다면.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는 이의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뭐 그리 대단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날마다 공상이라. 허튼 낭만에 젖음이라. 생각만 많고 마음만은 간절하다는 것은 다 허튼 수작이다. 한 마디로 불순종의 다른 모양이다. 내가 돌봐야 할 몸뚱이 하나 돌보지 못하는 위인이, 자식에게 말 한 마디 주의 음성으로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위인이, 아내의 무거운 어깨를 한 번 토닥거려주지 못하는 위인이 무슨 대단한 업적을 기리며 큰 꿈을 꾼들. 그리하여 설령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 한들. 그리 애써 얻은 건 모두 허사라.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만족에 겨운 일은 모두 헛것이라.

 

사명을 오인하면 일중독이 되고, 헌신과 희생을 오해하면 가정을 등지고, 열심과 최선을 강조하다 맡기신 건강을 잃는 법이다. 주의 사랑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부채가 된다. 마치 뭘 갚아야 할 사람처럼 군다. 나는 이제 이상하리만치 아들에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같이 목욕을 하고 다시 교회로 올라와 잠깐 누웠던 게 잠이 들었다. 딸애 퇴근에 맞춰 같이 닭갈비를 먹고 들어왔다. 곁에서 아내가 슬그머니 손을 잡더니 조금만 참어, 그런다. 느닷없기는! 너무 신경 쓰고 마음 쓰고 있다는 걸 아내는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1:21).” 그렇듯 나의 믿음과 소망까지도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있는 것이었으니!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부디 그러할 수 있기를.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그럴 수 있는 것은 내가 날마다 성전을 향해 올라감이다. 그러그런 중에도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결코 뭣 모르고 하는 게 아니다. 젖 뗀 아이면 자기 의지가 있다. 그 의지로 어머니 품에 있음이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