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빌레몬서 1:20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다. 인격적인 일대일의 관계가 아니면 모든 게 허사다. 수천 명을 구제하였다 해도, 수만 명을 죽여 악을 도모하였던 이와 다를 바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자식에 대한 마음으로 주의 마음을 알겠다. 같이 있을 땐 같이 있어서 어렵고 없으니 없어서 어렵다. 한참 마음을 졸이고 안타까워하다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알겠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면 두려움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걱정이 늘 앞서서 말이다. 이에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써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아니면 당해낼 방도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는가보다. 마음으로나 육신으로나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그래서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귀하였구나.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심고 거둠의 원리와 같이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였으니,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7-8).” 아이에 대해 애달파하는 마음조차 과하면 병이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 자리에 다른 아이를 두셨다. 육신의 약함을 두셨고 이런저런 생활의 어려움도 두셨다. 이로써 겸손을 배우게 하신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어눌한 아이의 말씨와 달리 그 마음에 주를 바라는 성품이 귀하여 감사할 수 있는 것. 그 때문에라도 마음을 낮춰 도우심을 의뢰하는 일. 이 모든 게 적당함이었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25:27).” 이익을 도모하며 사는 삶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하여. 내가 주 앞에 지금 마음을 졸이는 까닭은 그러느라 수고하고 사람을 좇고 어떤 것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야 하는 마음의 고달픔 때문이었다. 그게 어디 젊어서만 그러하겠나.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자족할 수 없음으로 취할 수 없는 즐거움에 대하여 답답한 것이다.
아버지의 설교는 성경에서 성경으로 말씀을 가져와 그 놀라움을 더했다. 나의 남은 생이 또한 붙들고 서야 할 유일한 것이 성경인 것을 새삼 알게 하였다. 아들이 필리핀으로 돌아간 빈 마음에 ‘아픈 아이’로 채우시려는가, 유난히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주일이었다.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어떤 마음. 비록 우리가 떨어져 살아야 해서 애달픔이 있겠으나 그래서 다루고 누릴 수 있는 성장이 있었다. 이를 아들에게도 확실히 하였다. 같이 그 사춘기 시절을 보냈더라면!
그러나 그 빈 시간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지할 수 있는 훈련이 되었다. 돌아보니 그땐 정말 너무하시다 싶게 일부러 그리하셨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미국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계셨고 아들은 필리핀에 떨어져나가야 했던 때에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과연 신대원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을까?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할 수 있었을까? 죽으나 사나 주만 의뢰할 수 있었을까? 주일 날 아침 아버지와 나는 각자 말씀 묵상을 끝내고 식탁에 앉아 그런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전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아버지의 주장은 그것이었다. 내가 아들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기도 하였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그 관계가 분명히 올곧을 수 있는 마음으로 경건을 이룬다. 이 관계는 ‘어쩌다 어른’이 아니다. 허튼 게 아니다. 창세 전, 이미 택정하시고 예정하신 관계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를 위해 오늘을 두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그러므로 영생을 취하라는 게 성경의 일침이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일갈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내 안에 끊는 어설픈 감정도 적이 될 수 있다. 괜한 염려와 근심으로 두려움만 가중될 뿐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내 안에서 이미 측량될 수 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나의 심령이 주 앞에 어떠한가? 그 의뢰의 정도에 따라 삶의 고달픔은 무게가 다르다. 누구는 자족하고 누구는 자복한다. 누구는 감사하고 누구는 감감하다. 이에 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공의라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21:2).” 그 앞에 두려워 떨 줄 아는 게 지혜이었다.
여기서 간절함이 나온다.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20:11).” 무엇을 바라는가. 어떤 데 마음이 가 있나. 온통 무슨 생각으로 붙들려있나. 주를 바라는 정도가 너그러움을 확장한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10:22).” 고로 족한 줄 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18:22).” 이 연합은 표상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오늘 시편의 고운 가락이 느껴진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주가 담으셨다. 그것으로 애달프다 그래서 주를 더욱 의지하게 되는 일이어서, 물리적으로 자식과 아내만을 두고 읽을 것이 아닌 듯하다. 내 곁에 두시는 이, 저 아이, 한 영혼, 생전 만나지도 못했으나 어떤 이의 관심, 또는 기도, 이 모두가 연합이다. 동거다. 내 안에 들어오는 누구 이야기로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모든 것.
다른 식구들은 아직 잠들어 있을 때 아버지와 식탁을 나란히 하고 들었던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의 관계에 대하여, 이 말이 내 귀에 들어올 수 있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너무 먼 길을 또는 오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였으니, 이처럼 들을 수 있는 귀가 은혜이었다. 귀하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이 보배이었다. 감사다. 찬송이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나니,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아이에 대한 간절함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일생 목회에 전념하던 이가 노년에 성경을 등지고 그릇된 길로 행하는 일이 허다하고, 교회를 몇 개씩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데 헌신하던 이가 엉뚱한 데 기웃거리며 예언을 바라고 누가 대신 대언하는 소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비로소 베풂은 말씀으로 붙들렸을 때이다.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21:26).” 나는 잠언의 명료함을 사랑한다.
군더더기 없는 말씀으로 직설한다.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31:20).” 그럴 수 있기까지 겸손이 우선이었다. 당장의 유익이 나의 영혼을 병들게 하였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16:19).” 인자함으로 드러난다.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19:22).”
그러므로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몬 1:20).” 주가 내게 더하시는 말씀이었다.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주님. 이는 돌이켜 하나님으로 인하여 나의 마음이 기쁜 게 힘이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울컥, 내 안에 이는 어떤 슬픔에 대하여 그 고달픈 생의 무게가 결국은 주를 알아가는 길이었겠다. 동행이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이를 배우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끔찍한 시행착오가 되풀이 되곤 하였는지 모른다. 그것을 통해 도우심을 알게 되는 일이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27:17).” 이 길을 또 아이들이 걸어야 한다는 데 마음을 졸인다.
부디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몬 1:7).” 그러하여서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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