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전봉석 2018. 9. 21. 07:30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브리서 4:9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아직 젊어 보이던데, 한 여자가 휠체어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간병인인지 어머니인지 다른 여자가 얼굴을 바짝 기울여 뭐라 다정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옆으로 목발을 짚은 아이가 위태롭게 지나가고, 전동휠체어를 탄 노인이 위태롭게 그 옆을 스쳐갔다.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재활병동이 있어서 그런지, 모두가 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서둘러 병원에 일찍 도착한 나는 아침에 쓴 묵상 글을 다시 읽으면서 힐끔거렸다.

 

참 고단한 인생이다. 저마다 정신없이 사느라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인지.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나는 영원한 안식을 사모한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10).” 감사하게도 간이나 담낭은 깨끗하였고, 결국은 신경성이라는 것인데! 의사는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약을 지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전화가 들어왔다. 내달에 있을 영화제 홍보팀의 누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그만두는 바람에 그 일에 적합한 누굴 찾았고, 나는 아이에게 모처럼 전화를 걸어 요즘 근황을 묻고 그리 연결해주었다. 서로 잠깐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데 ‘죽지 못해 산다.’는 식의 말들이라 그저 엄살로 듣기에도 안쓰러웠다. 아이는 여전히 남자 아이와 동거를 하고 있었고, 서울시에서 하는 무슨 일에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그렇게 죽어라 학교 다니고, 비싼 돈 내고 공부했나 싶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1).” 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힘에 겹고 안 아픈 사람은 안 아픈 몸으로 힘에 겹다. 그렇듯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친구는 할 말이 너무 많다면서, 일이 바빠서 나중에 연락할게, 하고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아이는 일하는 중이라 몇 번을 끊었다가 다시 통화를 해야 했다.

 

우리는 인생의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운다. 일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다, 그래서 교회를 좀 나가는지 하고 물으면 다들 풋, 하고 웃으며 한가한 소릴 한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일에 겨워 피곤을 털어내려는 듯 나름의 휴식을 찾는다. ‘아이돌’이 대세인 게 그래서 위로를 얻고자 하는 일이다. 말 그대로 우상이다. 어쩌면 우리는 첫 계명을 소홀히 함으로 나머지 아홉 개의 계명을 모두 범하며 산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별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수밖에. 뭐라 한들 저마다의 고집과 자기 생각으로 가득하니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친구는 그냥 친구로, 아이는 그냥 선생으로 족한 것이지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면서도 오늘의 족함으로 감사하였다. 전날에 이어 평양회담을 이어가는 특별방송을 보면서 ‘어떤 감격’을 생각하였다. 어느 훗날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하는 오늘 말씀이 위로의 손길로 느껴진다.

 

비록 지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그렇듯 울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복이구나, 생각이 든다. 울 수도 없는 나의 친구와 아이는 그저 ‘악으로 깡으로’ 버티듯 사는 거였다. 저마다의 우상 때문이다. 조금 더 가보면 조금은 더 나은 게 있을 거라 여긴다. 아니면 그냥 세월을 흘려보내듯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병원 안의 사람들은 그나마 운신을 가눌 길 없어 목발에 의지하거나 휠체어에 앉아 간신히 살고, 병원 밖의 사람들은 설마, 하는 자기 위안을 붙들고 버티며 산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 17:16)” 바울의 심정을 알겠다. 우리는 첫 계명만 바로 지켜도 나머지 아홉 개의 계명은 어길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안식’을 여기에서 찾고 있으니 그 수고가 끝이 없다. 사역이 꼭 사역이어야 사역이겠나? 주신 삶에서 충실한 것. 감사로 이 모든 걸 받고 주를 찬송하는 일.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못 걷게 되었을 땐 앉아서라도 맡기신 이 하루를 다하는 일. 충성이란 주신 바 그 맡기신 이의 뜻을 다하는 것이다. 한 발을 떼어 옮기느라 전력을 다하던 어느 젊은 아이의 걸음걸이를 생각했다.

 

우리에게 두신 한 날의 사역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곁에 두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새로 온 아이는 자꾸 학교에서 똥을 싸고 온다. 아내는 아이를 먼저 씻기는 게 일이 되었다. 전에 같으면 지겹다는 소릴 먼저 할 텐데 요즘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애 얘기를 먼저 하고 예뻐 죽겠단다. 중1 계집아이는 일부러 골 지르듯 자꾸 엎어져 잔다. 뭐라 하면 만사가 귀찮은 투로 심술을 낸다. 교육비가 2년은 밀린 아이는 사춘기가 왔는지 하는 짓마다 퉁명스럽다.

 

도무지 예뻐할 게 없는 아이들을 맡기신다. 돈 때문이라, 생각할 땐 서럽던 일이 먼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고 다음은 우리 곁에 두신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서 이를 사역이라 여기면서부터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어떤 힘’이 난다. 아내의 표현이다. 수다를 떨 듯 어느 아이 이야기를 하고 누구에 대해 말할 때, 나는 힘들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신이 난단다. 때론 짜증이 또 회의가 신물처럼 올라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까지도 꿀떡, 삼켜 넘길 수 있는 것이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오늘 말씀은 이를 상기시킨다. 안식의 주변 경관이 아니다. 조건에 따른 만족도 아니다. 그리 여기는 동안에는 우상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저 그 마음에는 ‘~만 되면 좀 나아질 텐데’ 하거나, ‘~을 할 수만 있다면 훨씬 좋아질 텐데’ 하는 따위로 미룬다. 이는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출 34:17).” 하는 말씀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제다.

 

안 믿는 사람들이야 본래 그런 것이고, 믿는다고 하는 우리 안에도 수시로 드는 마음이어서 어릴 적 향취에 젖고 낭만에 사로잡힘으로 오늘을 외면한다. 해야 할 사명을 미루면서 새로운 비전을 꿈꾸는 일은 모두 거짓되다. 거짓말의 가장 밑바닥에는 자신이 원하는, ‘너의 신상’이 있는 셈이다. 기도도 했고 누구의 동조도 구했고 나름의 판단도 옳은 듯해도, 오늘을 믿고 서지 않은 사명감은 모두 일장춘몽이라.

 

꿈꾸는 게 사는 일보다 편하다. 나도 선생님처럼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는 아이의 부러움이나, 너는 팔자가 좋다. 말하는 친구의 비아냥거림에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이 더하신 것보다 더 나은 게 있을 거라 여기는 게 모두 우상이다. 하나님이 더하신 가장 확실한 사역은 오늘이다. 이 한 날, 내게 두신 몸뚱이와 지긋지긋한 형편과 해도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막연함이 곧 사명이다. 사는 게 사명으로 여기지 않는 이상 별도의 어떤 고귀한 사명이 주어진들 바를 수 있을까? 우상을 발판으로 하는 자기 소망은 모두 지금을 부정하기 위한 낭만일 뿐이다.

 

‘~ 아니었어도’, ‘~만 돼도 좋겠는데’ 하는 따위의 바람이 모두 우상이다. 자기가 만든 사역을 꿈꾸는 일은 헛되다. 가령 아이는 이제 와서 자신도 미술 말고 이공계열을 전공했어야 한다고 푸념한다. 누가 어디에 턱, 취직을 하고 연봉이 얼마 어떤 대우로 살고 있는지 부러워하면서 하는 소리다. 종종 목회도 그리 꿈꾸는가. 내 안에 이는 어떤 바람을 나는 경계한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는 식의 간구는 엄연히 회피다. 맡기신 오늘을 부정하는 내일은 모두 우상이다. 이를 위해 애쓰는 일이 숭배다.

 

나는 왜 이처럼 자꾸 속을 끓이는가했더니, 아들이 하려고 하는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속상해서, 그게 아닌데, 그렇다고 억지로 말릴 수도 없어서. 애간장을 쥐어짜니 의사의 그 안쓰러운 눈초리. 신경성이시네요, 쯧. 하고 약을 처방하는데 속수무책이라. 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을 두고 주께 앉는다. 여기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운다. 주의 품에서 안식을 그리워하며 숨을 몰아쉰다. 무언가 다른 구원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히 4:7).”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은 오늘 뿐이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8).” 그러므로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잠 7:14).” 오늘이다 오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9).”

 

그러므로 울 거 없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중요한 건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9).” 나의 기대, 어떤 희망, 또는 남다른 비전을 운운하며 소원을 두고 있는 것을 바위에 메어쳐야 한다. 눈물을 닦고 바벨론 강변을 벗어나자.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온통 ‘아이돌’이 판치는 세상에서 저마다의 우상을 가슴에 품고서야 어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5).”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8).” 부디 주의 안식에 드는 삶으로 나의 날들이 채워지기를. 그러기 위해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9).”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날들로 살 수 있기를.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길은 당장 곁에 두신 저 한 아이 한 아이를 보듬고 주의 사랑으로 돌보는 일이지 않겠나. 뒤뚱거리며 출근하는 딸애 밥을 차려주고, 오늘 오는 아이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여기가 시온이다. 오늘이 안식이다.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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