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브리서 6:3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길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늦은 시간에 운전하여 아버지 댁에 왔다. 이렇듯 분주한 날들로 인해 마음이 종일 긴장되었다. 중3 아이들 시험 때문에 아내는 보충을 하였고 나는 교회에 나가있었다. 롤 케이크를 몇 개 사서 주차장 관리인과 우리 아파트 같은 동의 관리 아저씨와 같은 층 어느 아주머니께 드렸다. 느닷없는 아내의 생각이었다. 우리 형편에 맞는 정도의 일이라 더할 수도 없었다.
주일에 교회를 비우고 온다는 게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아픈 아이는 혹시 잊었을까하여 다시 문자를 넣었다. 중3 아이가 오전에 일찍 왔었다. 글도 쓴 게 없으면서 그리하는 것을 보면 아이가 곧 교회로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말을 들어주고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이었다. 사역은 어떤 사업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복음은 그래서 개념이나 철학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다윗의 이야기는 예수를 말함이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14).” 이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통해 나타내는 예수의 이야기다.
나에게도 그동안 위로가 되었던 것들로부터의 해방이 주의 이야기를 바라게 한다. 더는 친구도 건강도 돈도 명예도 그 중심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에 두시는 이런저런 생각과 병적으로 이는 이런저런 두려움까지도 주를 바라게 하신다. 바울 사도의 증언처럼 나는 예수의 종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값을 주고 산 자이다. 내가 이룬 나의 이상과 꿈이 아니다. 어떤 목표나 기대도 아니다.
이는 이제 기쁨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9-10).” 하는 말씀의 의미를 알겠다. 그리고 집에서 공부하는 중딩 아이들을 위해 빵을 사들고 들어갔다. 추석이다. 모두 들뜬 가운데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 기특하였다. 주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 6:3).” 오늘 말씀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중3 아이 하나의 마음도 돌릴 수 없다. 싫다고 하는 아이의 고집을 꺾을 방도가 내게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를 하는 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오늘 여기에 쓰시려고 두시는 그릇이면 족하였다.
어쩔 땐 그냥 시늉만 내는 사람일 뿐이다. 보면 늘 아쉽고 부끄럽다. 하는 척만 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다.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뭘 더 바랄까? 내가 얼마나 행하고 이루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였다 할 수 있겠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어떻게 여기까지 운전하고 왔는지 아득하고 멍할 따름이나 무사히 인도하셨다. 이게 그냥 대수롭지 않은 듯하나 매사에 주의 손길을 안다.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의 출처도 안다. 주가 이루시는 역사의 현장에 있다. 가령 누가 우릴 위한다. 그게 어찌 저의 마음뿐이겠나? 밤길을 운전할 때에 나만 잘한다고 될 일이겠나? 모든 게 기묘할 따름이다. 주께서 하시는 일은 기이할 뿐이다. 내 영혼이 이제 잘 아나이다.
곧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5-6).” 어떻게 이해한 걸 설명할까? 내 삶에 나타나는 주의 손길을 어떻게 들려주고 보여줄까? 나는 말할 수 없는 중에 주를 찬송하게 된다. 운전을 하면서, 아이가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보잘것없는 빵을 건네면서 내가 아니라 주의 손길을 느낀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도 못했는데 아내가 불쑥 그리 권하였고, 마침 지하 주차관리 부스에 있는 낯익은 아저씨를 생각하였다.
절묘하게 서로 마주치는 어떤 순간이다. 우리는 그럴 형편도, 아니고 공연한 게 되지 않을까 싶다가고 그리할 수 있는 정도만 그리할 수 있을 때 그리 행하는 게 증거일 거라 여겼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 늘 빙충맞기 이를 데 없으나 나를 위하시고 귀히 사용하시는 일이어서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때론 벅차다. 그럼에도 해놓고 얼른 잊는 것. 부끄러워하지도 않지만 자랑하지도 않는 것.
그래서 오늘 말씀은 경고로 들린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내 곁에 그런 자들이 여럿 있다. 나 역시 그럴 수도 있었던 자라 등골이 오싹하다. 그런 나를 어찌 돌이키셨을까? 생각하면 은혜다. 긍휼하심이다.
주의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사탄의 뜻에 따라 길을 가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그런 유혹은 항상 있는 것이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나는 더는 안 그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어 더욱 두렵다. 어떤 계기로 또는 어려움 때문에 주의 뜻을 빙자하여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을지. 그럴 때면 오늘 내게 두시는 신경증이 어느 것보다 귀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9).” 어떻게?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10).”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고 주의 길 가게 하시는 이가 오늘도 나를 붙드심으로 누굴 생각하고 아이를 위해 바라고 구할 수 있는 마음도 허락하시는 것이겠으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1-12).” 끝까지, 소망을 품고, 게으르지 않고,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의 기업을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기를. 우리 아픈 아이가 잊지 않고 주일을 잘 지킬 수 있기를. 중3 아이가 언제고 주일이면 교회로 나오는 믿음의 아이가 될 수 있기를.
같은 층의 아주머니가 그 마음의 소욕에 따라 늘 우리를 마음 쓰는 것처럼 주께 더욱 나아가기를. 다리를 저는 주차부스 안의 아저씨가 주께 감사하는 사람이기를. 그저 나의 바람과 기도는 막연하여서 별 거 아닌듯하나 그러므로 주께 의탁하는 것이었으니,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비루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사역 위에도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쓸모없고 별 수 없는 나를 주가 쓰시는 것이었으니.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고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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