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전봉석 2018. 9. 30. 07:12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3: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3-4

 

 

무슨 요릿집인줄 아는가, 공부만 시켜달라고 아이엄마는 말했다. 기껏 낮에 전화하여 두 애를 그만 보내겠다고 했다가 작은 애만 보내겠다면서 한 소리다. 어떤 모멸감이 일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편네라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냥 같이 사는 남자를 아빠라 부르게 한다고 다 큰 아이들이 모를까? 고1 큰아이는 집에 들어오기는 했는지, 학교는 왜 그만두게 했는지. 술에 취한 목소리 같다며 아내는 말했다.

 

참으로 가관이라. 때론 정말 싫증이 난다. 느닷없이 낮에는 두 아이 다 그만 보내겠다고 하여 속이 후련하였는데 다 늦은 저녁에는 저 혼자 변덕을 떠는 꼴이니. 둘째는 지금 당장 공부보다 대화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을 해주었더니 그 모양이다. 자기에게 갇힌 사람이라.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애들은 문제없단다. 공연히 오지랖 넓은 일이 됐다. 그러니 어쩔까?

 

오늘 말씀은 시큰둥한 내 마음을 두고,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뭘 어찌 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신다. 오고 안 오고는 내 문제가 아니다. 한데 보내시는 일이면 먼저는 아이의 아픔을 같이 해야 하고, 저처럼 몰지각한 엄마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한때는 교회를 다녔다는 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 영혼이 상한 것이다.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제대로일 리 없다.

 

아이를 보면 안 된다. 아이엄마에게 기대를 걸면 어림없다. 예수를 보자. 어찌 참으시고 길이 함께 하셨는가를 생각하자.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 더한 꼴을 당하고 그 수모와 멸시와 고통도 참으신 이를 생각하자. 그의 치욕을 지고 가자. 오늘 말씀은 새삼 일깨우신다. 어떤 동조를 기대했던가? 한두 마디 말로 저의 갇힌 영혼이 풀려날 줄 알았던가?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6).”

 

중3 아이가 이틀 밤을 새서 소설을 완성하였다고, 새벽 여섯 시가 다 돼 글을 올렸다. 완성했다는 글은 없고 다소 그런 내용의 짧은 소견 글에 나는 장하다고 해주었다. 설령 그게 거짓말이라 해도 그렇듯 또 달려가 줘야 하는 것이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하고 외치는 그 심정이 오죽할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시 또 달려가 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호응하고 들어주고 격려하고 잘했다고 응원해 주는 일. 이 싱겁고 막연하고 덧없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만 종이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때론 내가 납득이 안 되고 내 취향도 아니고 역겹고 화가 난다 해도,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충성이란 그런 것이겠다. 결국 쓰시는 이의 용도에 따라 쓰임을 받는 게 복이다. 오늘 여기에 두신 이, 여기로 저 애를 보내시는 이의 뜻을 따라.

 

그런저런 사연과 갇힌 영혼으로 살아가는 아이나 아이엄마나 그 가정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히 13:18-19).” 기도로 기도를 이루는 일이 충성이었다. 우린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 없이는 해결이 안 되는 이를 두고 주께 의지하는 일.

 

다음 이야기는 주의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어찌 쓰시려는가, 그것은 주인의 뜻이다. 다만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그러니 귀한 그릇은 값나고 비싼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다. 거룩하여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다. 비록 간장종지면 간장종지로 국사발이면 국사발로 그 쓰심에 합당하면 될 일이다. 왜 내게 이런 걸 담으시는가, 누구보다 왜 많고 적은가, 어디에 쓰시려는가 하는 따위의 질문은 모두 우문이라. 그러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후 9:27).” 그러할 줄 아는 게 실력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그 속을 삭히며 마음을 다잡는지 어이없어하면서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어쩌겠는가? 아이엄마도 어쩔 수 없어 그러는 것을. 할 줄 아는 게 오해와 착각과 자기애에 갇혀 바동거리는 것뿐이었으니, 그래도 전에 교회를 다녔고 한때는 믿는 사람이라 하여 기대했던 게 허사였다. 거기까지 우리가 할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7-8).” 우리는 다만 배우고 또 익히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다른 방도를 구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9).”

 

저들도 어쩔 수 없어 그러는 것이니, 어쩌겠나. 그러면서도 곁에 두시는 이가 함께 하게 하시는 일이면 묵묵히 받아내고 또 어르고 달래 품고 가는 수밖에. 아닌 건 아니겠으나 아니라고 말을 한들 알아듣지를 못하는 일이니, 곁에 두시는 동안에는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하며 저들을 받아내는 수밖에.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저를 안타까워하되 저의 죄악 됨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하되 미워하고 미워하되 외면하지는 말아야 하는 일이어서 무슨 요릿집에서 주문하듯 바라는 저의 오해까지도 받아내는 일이었으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그저 안 됐고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아이들과 대화하지 말고 공부만 시켜달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스스로 켕기는 것을 애들은 물론 남들도 다 아는데 자신만 정말 모르는 것인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말씀의 의미가 새롭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기분 상하는 일로 여겨서 될 게 아니다. 안 보내면 그만이었을 텐데 어쩌자고 또 5학년짜리 막내아이는 남겨두셨다. 여전히 안고 가야 할 일인가보다. 아내에게 그리 말해주었다. 지긋지긋해서 두 아이 다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홀가분해했었다.

 

우리도 다 같아서,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4-15).”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엄두도 내지 말 일이고, 다만 그럼에도 맡기시는 일이면 할 수 있는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6).”

 

주만 바란다는 게 그리 고상하지도 낭만적인 일도 아니다. 때론 치욕스럽고 구질구질하고, 언제까지 이런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가, 신물이 나는 일이기도 하다. 한데 주가 참으셨다. 그 치욕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주께서 또한 우리의 견디는 자리에까지 함께 하심이다. 나는 중3 아이가 교회에 나오기를 기도한다. 기도를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히 13:18).” 부디 그런 가운데 주를 바라며 아이를, 그 아이엄마를, 저들 가정을, 저들이 잃어버린 주의 사랑을 놓고 기도한다.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19).” 그리 읽고 그리 답하였다. 서로가 기도해야 하는 일이다. 주님, 하고 부를 수 있는 게 귀하였다. 아뢰고 또 바라는 보잘것없는 마음이나.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1).” 그렇듯 그리하여 주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기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25).” 기도한다. 위하여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기도한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