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전봉석 2018. 10. 2. 07:2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야고보서 2:18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편 148:13

 

 

결혼기념일인데 서로 시큰둥하게 됐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뚱하니 그리 됐다. 딸애가 몇 주년인가 묻고 케이크를 하나 사왔는데 그 세월이 까마득하였다. 햇수로는 28년이고 연애까지 합치면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었다. 티격태격 늘 애들처럼 구는 사이여서, 세상에서 제일 만만하고 편한 사람이었다. 저에게 나는 어떠한가, 할 말이 별로 없다. 늘 저쪽이 헌신과 희생이라. 솔직히 나 같은 사람과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긍휼함이 아닐 수 없다. 툴툴거리는 아이처럼 구는 철없는 나의 성품에 비하면 고마움만으로 가득하다.

 

판단하고 비난하는 마음은 그 기저에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낫다는 생각 말이다. 또는 뭐라 하는 잔소리의 90%는 내가 그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감이다. 강박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부끄러워서이다. 가령 남의 어떤 모습이 싫다면 그 싫은 모습은 내가 은폐하고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시당하는 것 같다면 먼저 내가 그리 무시하고 있으면서 그런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면 그리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보이지 않는 녹음기’ 비유는 이럴 때 적절하다. 곧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우리 목엔 보이지 않는 녹음기가 하나씩 있다. 누구를 판단하고 어떤 기준을 가지고 뭐라 비난하고 일컫는 말들이 평생에 녹음이 되어, 생각까지도 거기에 기록으로 남는 것이다.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자신이 했던 말과 생각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저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한 것이라. 늘 자신은 맞고 저는 틀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달리 저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 결국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서 그것으로 저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잦고 또 쉬운지 모른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누굴 죽인 적은 없다 해도 얼마나 자주 또 무의식적으로 남을 판단하고 욕하고 멀리하곤 하였는지. 마치 나는 그럴 리 없다는 식으로 침소봉대하기 일쑤였으니, 남의 작은 허물을 크게 나무라고 부풀려 나는 마치 그보다 나은 것처럼 구는.

 

말씀 앞에서 나는 부끄럽기만 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믿는다고 하면서 나아지는 행함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늘 곁에 있어서 사소한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하기 일쑤였으니. 가장 곁의 사람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이면서 어찌 저 먼 남을 사랑한다 할 수 있겠나.

 

덩달아 뚱해서 말도 안하려니까 내가 더 답답하였다. 그러면서 드는 마음이 늘 나는 탕자를 욕하고 비난하던 맏이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종교적이고 뭔가 경건을 도모하는 사람인줄 알았으나 실은 그 또한 아버지를 떠나 있던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 차라리 곤죽이 되어 용서를 구하며 돌아온 탕자보다도 못한 삶이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걸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그런데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늘 주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 역시 밖이었다. 더는 회개가 필요 없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 같이 말이다. 그리곤 남을 판단하기를 선을 더 행하여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나무라고 훈계하고 그리 비난하는 것이었다. 마치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아이가 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기를 쓰고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렇듯 내가 아이를 돌보는 줄 알았는데 실은 아이로 인해 내가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오후께 중3 아이가 뜬금없이 들이닥쳐서 더욱 확실하여졌다. 귀찮고 성가신 마음은 잠깐이고 그리 와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와중에 얘를 날 위해 여기 두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주의 길이 참으심이 아니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돌이켜 주 앞에 세우셔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탕자이면서 동시에 늘 나도 그랬으면서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렇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는 고약한 심보가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거저 받은 걸 남에게는 값을 물게 하려는 게 아닌가. 은혜를 행위로 구하는 자는 그만큼 힘에 겹지만, 은혜를 받기만 하고 아무런 행함이 없는 자는 그 귀한 값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툴툴거리는 꼴이었다. 그러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허밍으로 따라 부르던,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는 찬양이 나를 흔들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거저 받는 것이면서 내가 무얼 하여 그 대가로 얻는 줄로 아는 삶이려니 그게 또 얼마나 고달프겠나. 이 정도는 해야, 이만큼은 해야 한다는 우리 안의 요구가 실은 다 교만이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게 그런 거였다.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게 말이다. 그럼 무슨 수로 그 자격을 갖출 것인가? 돌아온 동생을 비난하였던 맏이의 마음이 내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던 게 아닐까?

 

늘 티격태격하면서도 살아온 날들 가운데 같이 산 날이 훨씬 더 많아지면서 나보다 더 위하고 귀히 여겨야 할 사람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온전한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하는 경우여서, 열에 아홉은 이혼을 했거나 별거중이거나 다른 애인과 같이 사는 거였다. 아이들에게 결혼생활이란 살다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사이로 인식되면서, 가족의 해체는 친구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 일에도 어려움을 겪게 한다. 중3 아이가 뜬금없이 토스트를 하나 사들고 찾아온 이유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친구 문제로 한참 복잡할 때인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래서 그냥 미루고 덮어두면 또 그런 일이 왔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회피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니 지금은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지만 이해하고 용서하는 노력은 결국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저는 안 그래요, 하는 아이의 말에 뭐라 길게 설명한다고 될 일은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또 이르고 일러 마주하고 부딪치고 티격태격 다투고 싸우며 피곤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가는 것이다. 결국엔 주께서 나를 끝내 사랑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티격태격 으르렁거리며 사는 사이 같지만, 그런 가운데서 나는 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신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하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 하는 고백으로 살게 하신다.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아는 데까지는 너무 까마득하여 불가능한 일이겠으나, 잠잠히 주의 마음을 따르는 일. 아내를 위하고 사랑하는 길이 곧 내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이었고, 저 아이를 품고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내가 주를 사랑함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물론 우리의 행위가 믿음의 근거는 아니지만 증거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20).” 오늘의 말씀은 나의 한계를 직시하게 하신다.

 

돌이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의 사랑을 잠잠히 받을 줄 아는 것이고, 이는 주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데 근거가 있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로 나타나는 삶은 나의 믿음의 근거로써가 아니라 증거로써 입증이 되는 일이다. 안 보이는 믿음의 실체를 무엇으로 증거하여 확인할 수 있을까? 내 안에 두시는 ‘저런 아이들’을 향한 ‘어떤 마음’이 주의 것이었다. 그래서 고작 물 한 잔을 내어주는 일일지언정! 이런 점에서 나는 나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모두 사역자이기를 기도한다. '어떤 직업'이냐에 따라 저가 말품을 팔고 발품을 팔고 사는 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종종 삼삼오오 저들이 하는 말로써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알 수 있다. 한 무리는 보험설계사들로 같이 모이면 고객들 이야기나 새로 나온 상품 이야기다. 또 어떤 이들의 말을 듣다보면 저들은 건축하는 사람들이라, 현장의 어떤 일이 더디고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하는데, 하는 푸념이 줄을 잇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입만 열면 아이들 이야기나 있었던 하루 일과 중 상당수가 아이와 엮일 일로 그 영혼을 두고 주께 고하는 것이었으니.

 

그런 점에서 나는 나의 아들의 진로에 마음이 쓰이고 딸애의 일에 마음을 기울인다. 부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말품을 팔고 발품을 파는 데 있어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며 구하는 자리였으면 하고 기도한다. 그리하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그리 되고 그리 되어지는 삶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자르고 주께 기도하였다. 우리를 여기까지 함께 하게 하신 이가 남은 생애도 주와 동행하게 하시기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시 148: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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