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전봉석 2018. 10. 3. 0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17-18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편 149:5-6

 

 

위로부터 난 것에 대하여,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함과 긍휼과 선한 열매와 편견이 없고 거짓이 없는 화평함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 것. 다시 되뇌어 말씀을 곱씹어 본다. 어느 것도 나는 자신할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것이었다. 아, 그래서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하고 시편은 말하고 있구나! 곧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시 149:5-6).”

 

오래된 친구와 모처럼 길게 통화를 하였다. 갱년기로 한 여름 내내 고생을 하였다고 했다. 오십견이 와서 팔을 잘 못 쓰고, 슬슬 어디가 자꾸 아플 나이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어떻게든 낫게 하고, 무리하게 안 아프게 할 재간이 없는 나이다. 예전 같으면 하루 이틀 앓고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이제는 얼마동안씩 이어지고 아예 그리 달고 사는 게 하나둘 느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나으려 하기보다 적당하면 같이 달래며 가는 수밖에.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믿는 친구라 기도를 부탁하고 우리에게 두시는 하나님의 의를 바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어쩌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는 온통 아이들 얘기라. 그러니 말끝에는 기도를 부탁할밖에. 중1 아이 하나가 그만두면서 오히려 남은 한 아이에게 잘 됐다 싶었다. 이번 주엔 어떤 말을 하고, 듣고 예배로 인도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이가 싫단다. 현장학습도 가지만 혼자는 쑥스럽다면서. 그런 거 보면 오고 안 오고는 나의 생각이나 계획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더더욱 기도뿐이다.

 

막상 그러면 싱거운 마음이 들다가도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는 말씀에 가만히 멈춘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그런 거 보면 종종 나는 잊어버린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는 게 아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보내시는 하나님 때문인 것을. 친구에게 한참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은연중에 '나는 내 얼굴을 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막연하여서 어쩔 수 없을 때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께 대해 확신을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결국 그것으로 나의 의를 삼으려 할 때도 마음에 이는 생각은 부끄러움은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거리낌 없이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은 그러는 동안 내 안에 두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라.

 

그 확신의 비결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27:6).” 이런저런 어려움이 또는 내 안의 거짓됨까지도 나를 둘러싸지만, 나는 주의 장막에서 나의 마음을 드리겠고 주가 그리하심을 자랑할 것이다. 주가 이루실 것을 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마태는 먼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였는데, 나는 저가 ‘예수님의 자소서’를 그리 기록하였다고 생각한다. 왜 그처럼 숨기지 않고 낱낱이 적은 것일까? 유다는 어찌 생겨났나? 야곱의 온갖 잔꾀로 얻는 게 아닌가? 다윗은 그냥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게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낳았다고 기술하였다. 다말이 누군가? 라합이 어떤 여자인가? 누구라도 흑암에 앉은 백성이 아니겠나? 성경은 결국 ‘믿기만 하라.’는 데 방점을 찍고 싶었던 게 아닐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우리의 도덕적인 기준보다 하나님은 더 높으시다. 어떤 죄악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기술하여 예수님의 족보를 더럽힐 수 있을까 싶은데, 실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나님은 무엇도 용서하지 못하실 게 없다. 우리의 얄팍한 안타까움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더욱 위대하시다. 그리하여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럴 수 있나싶지만 저보다 더한 사람도 들어 주의 일에 동참하게 하실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우리를 붙든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나는 기도를 부탁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등 가운데서도 선명하시다. 결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친구에게 말을 하다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경성인지 신경증 때문에 그래서인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꾸 나는 입만 열면 아이 얘기다. 마음에 들어찬 생각이 저 애 문제다. 그것을 내게 두신 것이다. 맡기신 일이다. 그것으로 힘들고 그것으로 위로를 얻는다. 주를 바라는 마음. 그 믿음은 공연한 게 아니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이 믿게도 한다.

 

이러려니 저렇고 저러려니 이렇고, 현실은 늘 시비를 거는 듯하다. 몸은 자꾸 아프고, 그러니 어쩔래? 하고 묻는 것 같다. 그러다 친구에게 들려주던 말 가운데 답이 나왔다. 자꾸 이젠 건강하려고만 드는 게 더 큰 병이 될 수 있다. 그러려니 하고 적당한 건 적당하니 같이 가는 수밖에. 갱년기라 몸이 축축 쳐져서 종일 누워만 지냈다는 말에 그리 말해주었던 것 같다. 의욕상실이란 게 결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생겨나는 것이겠으니, 그럼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수밖에.

 

그러는 동안에도 내 옆에는 아이를 두시고 한 날을 새로 여시고 다시 누구를 붙이시는 것이니, ‘믿기만 하라.’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뭘 더 얼마나 잘해야 하는 게 아니고, 어떤 거룩을 또는 성결을 도모하느라 기를 쓰고 내가 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주께서 하시라.’ 주가 하실 수 있게 나를 내어두는 것. 맡김. 훗날에 우리들의 고백은 동일할 거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나의 못남도 그릇됨도 어처구니없는 방도도 그 결과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는 일이었다. 그럴 때 주의 말씀은 ‘내 얼굴을 찾으라.’는 것.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그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나는 이처럼 말씀으로 읽고 말씀으로 듣는 것으로 붙든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저 한 영혼을 구원할 수도 없으며 돌이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둘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내게로 오라.’ 하시는 말씀이 아니면 이 일을 어찌 계속 되풀이 할 수 있겠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래서 친구에게도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내 생각이 또는 어떤 열심이 나를 쥐고 흔들지 못하게 하려고.

 

이 짐 보따리를 어쩐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는 게 믿음의 본질이었구나. 믿기만 한다는 게 그냥 막연하여 방치하는 삶이 아니라, 그래서 더 확신을 갖고 주께 나아갈 수 있는 것. ‘주께 맡기라.’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8-9).” 내 안에 적이 한 가득이다. 염려가 문제라. 괜한 걱정이 목을 조른다. ‘믿음으로 굳건하게 하여 대적하라.’ 믿음을 시작하는 일이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럴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모두 의뢰함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5:6).” 이런저런 우여곡절의 삶이 살아가는 날 동안에는 계속될 것이겠으나 ‘믿기만 하라.’ 성경의 일관된 증거이다.

 

그런 가운데 가장 길들일 수 없는 게 우리 입이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자꾸 부정적인 말과 어떤 일에 대한 회의와 한탄과 원망을 일삼는 혀에 재갈 물릴 수 있는 방도는 기도뿐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그러할 때 ‘오직 위로부터 난’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7-18).” 어쩌면 오늘도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이 또한 근심과 걱정이 그것으로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것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그리하여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 그러할 때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 나는 친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결국은 내가 할 것이 기도뿐임을 내게 들려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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