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전봉석 2018. 10. 21. 07:18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1:20-21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편 17:14

 

 

어느 때보다 자신을 돌보고 그 영혼을 바로 지켜야 하는 때이다. 누구 뭐랄 거 없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었으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췌장암으로 위독한 동기 목사를 위한 기도부탁이 단체 방에 올라왔다. 어떤 안타까움에 뭐라 적을 수조차 없어 서로 ‘기도합니다.’ 하는 답도 올릴 수 없었다. 이처럼 서로는 각자의 영역에서 산다. 혹시 주께서 그 생명을 더 연장시켜주실까 하여 저의 처와 그 아이들을 두고 기도하였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였다. 나는 혼자 집에 있으면서 마음도 몸도 어려웠다. 누구는 사경을 헤매는데, 그 가족들의 슬픔과 두려움이 어떠할까 생각이 쓰였다.

 

바로 서야 한다. 언제든 주가 부르시면 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오늘 내가 어찌 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 같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 영생을 바라며 주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는 것.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어떻게 이룬 하나님과의 화목인데! 이를 소멸하거나 없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은 어떻게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훼손하려 든다. 출세와 성공이 또는 실패와 좌절이 우리를 쥐고 흔들려고 든다. 남 이야기할 거 없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고로 오늘 나에게 두신 하나님과의 화목은 직분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이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말씀이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9).” 무엇도 끊을 수 없게, 죽음까지도 이를 망각하지 못하게.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죽음을 목적에 두고 두려워하고 있을 저의 가족과 당면한 그 영혼의 곤고함을 생각하며 주를 바라였다.

 

이상하게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아픈 날이었다. 돌아눕지도 앉지도 못하게 쩔쩔맸다. 파스를 바르고 붙이고 혼자 끙끙거리며 토요일 오후를 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오기로 했던 이는 연락이 없었고, 오랜만에 연결이 된 친구는 반가움과는 별도로 교회를 멀리하였다. 전날에 회식에 있고, 토요일에는 누구 결혼식에 가야하고, 그럼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드리자고 했더니 그리 대답하였다.

 

너는 그럴 줄 알았는데 나는 그래도 여기 있겠다는 소리였다. 한 뼘 차이인 것 같은데 그처럼 서로가 사는 세계가 달랐고, 그 영역이 온 우주를 합한 것보다 멀었다. 한때는 같이 교회도 다녔고 저가 자란 고아원이 기독교 재단인 것을 아는데, 저는 문학으로 승화하려는가. 술 담배에 절어 중년을 맞고 있는 거였다. 나도 저쪽에 서 있었던 사람이라, 뭐라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더 안쓰럽고 답답하였다.

 

끙, 하고 돌아누우면서도 새삼 감사하였던 것은 이제 확신하는 하나님과 나의 화목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비록 육신은 연약하여 고통을 당하고, 저처럼 죽음의 목전에까지 다다라야 하는 일이겠으나 우리의 소망은 영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이다. 아직 너무 젊은 나이에 사경을 헤매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고통 중에 있는 저의 가족을 두고 안쓰러워하다가도 이 복음의 소원으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22-23).” 누군 그저 몽환적일 따름이다. 죽음 너머의 일은 손에 잡힐 리 없고 그 막연함에 대하여는 혹시나, 설마, 하는 것이어서 나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친구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일련의 두 정황은 내게 두신 교훈이다. 하나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아 채 그 뜻을 다 펼쳐보지도 못했는데 주가 데려가실 판이고, 고아와 꼽추로 평생을 고통 중에 살면서도 이내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하려 드는 시인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저를 두고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것이다. 어찌 행하실까? 나는 일련의 상황 앞에서 먼저는 나로 하여금 주와 화목하게 하신 이 거룩한 믿음을 감사하였고, 그것으로 저들을 각각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할 수 있어서 복되었다. 그러므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이와 같은 마땅함 앞에서 나는 주를 바람이다.

 

세상은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는 때에,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시 17:14).” 그저 무난하여 그것으로 만족하려 드는 이 땅이었는데, 돌이켜 주 앞에 부르시고 세우심으로 이처럼 화목하게 하신 것은 은혜였다. 부디 주 앞에 온전하여 평안하기를. 누구는 그와 같은 슬픔 가운데서 더욱 주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누구는 저 안이함으로 문학에 심취해 있는 것에서 돌아서기를.

 

다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나로 주 앞에서 만족하게 하신 날들을 감사하며. 부쩍 드는 생각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다. 남을 의식하고 가족을 염두에 두고 어느 영혼을 위해 주께 바라고 의지하는 날들이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화목이다. 이로써 내가 저들과도 화목할 수 있는 일이고 나아가 세상을 주께 아뢰고 고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그럴 수밖에 없는 저들 영혼을 안타까워할 수 있는 권리다. 긍휼히 여겨야 하는 의무다. 오늘에 맡기신 직분이라. 내가 주와 화목하는 것이고 이로써 모든 이와 화목하는 일일진대, 이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맡기신 복음의 책무이기도 하였다. 내 몸이 약하니까 그 의미가 더 새롭다. 아플 땐 아파서, 힘들 땐 힘들어서, 기쁠 땐 기뻐서, 즐거울 땐 즐거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너무 빤한 세상을 살며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유 1:16).” 그러했던 나를 돌이켜 오늘에 두시는 화목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17).” 곧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0-21).”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는 일.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4-25).”

 

죽이시든 살리시든, 그러므로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4-5).” 이에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6).” 곧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