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요한계시록 9:6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편 26:8-9
어쩌면 시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벌어지는 간극이 있다. 마치 나사로와 부자 사이처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 어찌할 방도가 없는 사이다. 자꾸 하나님에 대해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선언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정작 하나님은 없는 복음 아닌 복음이 판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자부하는 신앙보다 무서운 아집도 없는 것이다. 그저 듣는 것. 무던히 듣고 또 듣는 것이 말씀의 진가가 아닐까? 창세기로 넘어와 다시 읽으면서 성경의 주어가 하나님이신 것을 역력히 새로 느끼게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주격조사 ‘은, 는, 이, 가’를 빼고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들면 그게 이단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말씀하셨고, 만드셨으며, 부르셨고, 보셨고, 정하셨고, 쉬셨다. 있으라, 그리 되었다. 모든 동사는 하나님의 활동범위에서 묘사된다. 이를, 기억하라. 모든 동사의 정의다. 그런 뒤 쉬셨다. 쉼을 정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이는 명령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신 5:12).”
거짓말처럼 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게 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것인데, 저들의 이 휴식은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한’ 연장선상에서의 일의 하나다. 고단함이 끝이 없다. 그렇게라도 해야 다시 월요일에 출근을 하니까, 그저 일의 연장으로 여겨지는 휴식이다. 더하여 밀린 빨래를 하고 장을 보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여전한 일이다. 그런 저에게 교회를 오시라, 예배를 드리자 하면 기겁을 한다. 것도 고달픈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상이 예배가 되지 못할 때 주일도 예배로 드려질 수 없는 것이다.
기억하라. 지키라. 말씀은 왜 강한 어조로 명령하시는지 알겠다. 먹고 살기 위해 죽어라 하고 사는 꼴이니, 죽지 못해 사는 형국이었다. 듣다보면 사는 게 지옥이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계 9:6).” 그러니 참 교회 다니시란 소리가 어떤 과중한 일을 더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쉼이 없는 삶이란 그렇다. 안식을 거절하는 세대의 자명한 결과다. 단순함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친구 누이가 딸애와 이야기를 하였고,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더라며 어찌해야 하는가 물었다. 기도하시라. 본인의 잃어버린 신앙을 먼저 회복하시라. 여기 오는 ‘이 아이’도 말 나오고 4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였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주께 아뢰었었다. 그리 말해주었다. 쉼을 잃은 삶의 결과다. 저는 사느라 바빠서 먹고 사는 일이 지옥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 생활이 얼마나 성경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그래서 점점 우리의 간극은 벌어져 어느 훗날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더는 오갈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말이다. 문득 죽었더니 그리 멀어진 사이가 아니다. 이미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리 여겨졌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 12:29).” 성경의 이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논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시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저는 그저 두신 바 그 자리에서 묵묵함으로 순종을 더한다. 길쌈도 수고도 하나님이 하신다.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저는 다만 자유로울 따름이다. 보험을 들고 노후생활을 예비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공중을 훨훨 날아다닌다. 그 많은 새들은 다 어디로 가서 죽는 것일까? 나는 종종 산책을 하다 그런 상념에 젖곤 한다. 하늘 아버지가 기르신다.
아이가 와서 같이 성경을 읽고 작문을 하고, 수학 익힘 도형을 풀고, 선을 긋고, 오리고. 그러는 동안 열심을 다하는 저의 열심에 나는 회의가 들었다. 어찌 방통대를 할 수 있겠나? 아무리 사이버대학이라 해도 그리 목표를 가지고 하는 게 옳은 일일까? 당장 했던 말에 무논리로 답하고 엉뚱한 어휘와 다른 세계를 펼쳐놓기 일쑤인데. 그러다 말씀 앞에 세우신 것이다.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그저 그 자체로 이미 존귀하였다. 우리의 일상이 어쩌다 죽지 못해 사는 꼴이 되었고, 먹고 살기 위해 죽어라 하고 일하는 난센스가 되었는지. 먼저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기능적인 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통해 무엇을 바라는 것, 어떤 이유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 그렇듯 하나님을 이용하려 드는 사이가 되었으니 우리의 간극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하다못해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도 그리 사귀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저와 친해져서 무얼 노리는 관계는 친구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이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으신 관계다. 저는 주의 친구가 되었고 이는 우리에게도 이어졌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대하 20:7).”
친구란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온 사이다. 성경은 그리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으로 칭하셨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시며, 우리는 더불어 하나님과 친구다. 그런 친구 관계가 어쩌다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이용하려 드는 상대로밖에 여겨지지 않게 된 것일까?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교회를 다녀야 하는데, 사는 동안 살면서 의지할 수 있도록 종교 하나 있으면 좋은데, 그래서 아이를 교회로 좀 보냈으면 좋겠는데, 하는 따위의 말에 나는 뭐라 정색을 할 수 없었다. 마치 공부 잘하는 애랑 사귀고, 부잣집 아이와 사귀고, 뭔가 좀 득이 될 친구를 사귀라는 소리로 들린다. 모름지기 친구란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좋은 사이다. 관심사가 갖고, 말이 통하고, 생각을 알아주고, 그 마음을 잘 아는 사이다.
이는 그 안에 거하는 관계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아무한테나 이런 말을 하지는 않는다. 너니까, 너여야 하니까, 너여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니까, 나여서, 나여야 하니까 그리 들려주시는 거였다. 이를 나는 저에게도 말해주고 싶었다. 일요일에 하루 쉬는 날인데 교회를 또 나가야 한다는 게 일이어서, 일로 여겨져 단박에 고달프게만 느껴지는 쉼에 대하여는 뭐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기도할게요. 요즘 문득 나의 끝인사가 되어버렸다. 뭐라 한들, 중3 아이의 오해나 낼모레 환갑을 앞둔 저 나이든 친구 누이의 오해나, 어찌 말로써 말로 설득하고 설명할 길이 없어 나는 다만 기도할게요, 하고 말을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다.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제 일하신다. 창조하셨고, 말씀하셨고, 만드셨고, 부르셨고, 보셨고, 정하셨고, 쉬셨다. 그리 직접 하신 일을 창세기 1장은 엄연히 기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나를 위해 죽어주신 친구다. 그 친구를 위해 나의 날들이 죽어지는 일에 개의치 않는다. 도대체 이런 애를 데리고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를 꿀떡, 삼킨다. 어떤 목표나 훗날을 위한 수고와 길쌈도 아니다.
오늘 여기, 들에 피우신 백합화이다. 공중을 나는 새이다. 우리는 친구라.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주를 바란다. 주를 의지하며 주께 향한다. 그리하여 오늘 내게 맡기신 일은 안식의 연습이었다.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관여하는 일이다. 고로 하나님의 안식을 같이 누리는 일이었다. 잊을만하면 사회 곳곳에서 심신미약자의 범죄가 기사화 될 때 나는 더욱 절박하게 주를 찾는다. 어쩌겠나. 백합화와 새의 공통점은 묵묵함과 자유였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리하여 나도 저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 뭐라 일컫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지켜봐주고 함께 하는 동안 그렇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묵상하였다. 우리 사이는 기능적인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살 궁리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이시다. 저는 창조하셨고 만드셨다. 말씀하셨고 부르셨으며 보셨고 정하셨으며 쉬셨다.
듣고 호응하고 같이 바라보며 그리 여겨지는 믿음으로 쉼을 실현해가는 게 오늘 나의 일상일 거였다. 뭘 꼭 어떤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이 아니고. 실제 아브라함의 일을 가만히 읽다보면 뭘 그리 이룬 게 없다. 하나님께 특별히 구하고 바란 것도 없다. 조카 롯을 위해 소돔을 위해 기도한 대목이 어쩌면 전부다. 저는 다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단조로운 삶이었다.
때론 회의하고, 그래서 엘리에셀을 내세웠다. 때론 어긋나고, 그래서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 이스마엘을 낳았다. 때론 방심하여,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딜 가나 제단을 쌓았고, 그곳이 곧 주의 성전이었다. 예배를 위해 세겜으로 다시 가지 않았다. 저가 머무는 벧엘이 다시 제단이 되었다. 결코 저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친구였다. 하나님과 같이 하는 것으로 실수도 또는 허물과 죄악도 용서가 되었다.
나는 나의 단조로운 삶을 사랑한다. 하나님과 친구인 사이로 그 간극이 친밀하여서 감사하다. 더는 바랄 게 없다. 그냥, 하나님이면 다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시 26: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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