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7:10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24:1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7).” 마음이라고 하자. 또는 생각이나 자기 아집이라고 하자. 닫혔던 마음이고, 완고하여 스스로도 무거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던 ‘문’이다. 문은 닫으면 벽이다. 열리면 통하나 닫히면 단절이다. 여기와 저기의 벽이다. 막힘이다. 뭐라 해서는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마치 연애하는 사람처럼 나만 마음이 어려웠다. 아이에게 괜히 뭐라 했던 모양이다.
아내와 함께 멀리까지 돌아 자전거를 타고 갔다. 소래포구에는 무슨 행사가 열리는지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고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먹구름이 지나가며 설핏 빗방울을 흩뿌렸고, 바람은 을씨년스럽게 불어댔다. 열시에 올까? 그럴지도 몰라서 기다렸던 게 열한시를 훌쩍 넘겨서야 잠이 덜 깬 얼굴로 왔다. 차라리 안 왔으면 그러려니 하고 말았을 텐데, 뭐라 한 걸 중3 아이는 엉뚱하게 들었다.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건 참 싫증나는 일이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내와 점심을 먹고 다시 거리와 나왔을 때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그때 친구 누이가 전화를 주었다. 스물네 살 된 딸아이 때문이었다. 나는 묶어두었던 자전거를 풀다말고 한참동안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가면 무슨 소린지 들리지가 않았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삼십여 분 이야기가 이어졌다. 말이 고픈 이였다. 이따 저녁에 다시 전화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리고 저녁 일곱 시를 조금 넘겨 저의 말은 이어졌다.
이혼과 아이 아빠의 죽음. 양극성성격장애를 보이는 아이. 어느 심리 상담가에게 집착. 과도한 비용. 모친의 죽음으로 본인의 외로움 토로. 하나님을 그리워함. 월 2회 정도로 상담 횟수가 줄었으나 2년이 넘는 시간. 역으로 아이가 강해짐. 억척스럽게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함. 모 서점 카페에서 저녁시간 알바. 낮에는 어느 화장품 총판 일을 함. 메모해둔 것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가까운 교회로 가시라. 주를 영접하시라. 기도가 그립고 말씀을 바란다는 소리에 마음이 저렸다.
가까이 있으면 우리 교회로 갈 텐데, 하는 말에 가까운 곳 어디든 가시라. 주의 인도하심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계시다는 걸 말해주었다. 이처럼 아이 일로 통화를 하였다가 본인의 영혼이 갈급해하는 것을 알았으니, 주께서 예비하신 바라. 우리의 통화가 또는 저의 사모함이 저의 영혼이 주를 바라는 것이었으니, 나는 자신 있게 전하였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오늘의 나의 상태가 궁극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더욱 바라게 되는 것임을 확신하였다.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고 새삼 먼저 세상을 떠난 전남편을 그리워하다, 그 외로움이 실은 ‘아버지의 집을 찾는 탕자의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다닐 교회가 없다는 둥 꼭 교회를 나가야 하느냐는 둥 여전한 저의 엉뚱한 소리에 나는 그저 주의 이름을 부르시길.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주께서 인도하시는 손길로 오늘 우리의 통화까지도 실은 다 주의 은혜라. 중학교 때 영접하였던 주님을 아이 여섯 살 때 별거를 하고 중3 때 정식으로 이혼을 하면서 어그러진 신앙이었으니. 아이의 소극적인 성향이 그와 같은 충격을 안으로 흡수하게 하였고, 우울감은 양극성을 드러내며 나타났고, 급기야 자기 발로 정신과를 찾아가는 다급함으로 드러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그러한 아이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공식처럼 그 부모의 일과 연관되었다.
이를 자책하며 훌쩍거리는 저에게 우리가 아는 그 주님의 긍휼하심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산 날보다 앞으로 살 날들을 염려하는 저이에게 ‘주는 우리를 돕는 이시다.’ 주의 긍휼하심은 무궁하시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돌이켜 오늘에 두셨는가를 증거로 하여 말해주었다. 곧 아이 문제가 문제의 핵심이 아닌 것이다.
현실의 문제가 그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닌 거였다. 다음에, 내년 2월에 이사를 하면, 하는 식으로 미루기만 하는 저이에게 나는 다급하게, 지금이라. 이 때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나름의 상식을 끌어다놓는다. 전통과 그 의미를 논한다. 그 심리는 미루는 것이다. 여전히 설마, 하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저의 영혼이 살아나기를.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저 누나가 라면을 끓여주곤 하였다. 큰 누나는 무서웠고 형님은 늘 공부하느라 바빴다. 저의 낡은 집이 기억난다. 칠이 벗겨진 대문도 생각난다. 까마득한 옛날 일 같다. 우리는 모두가 어렸다. 한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나니, 같은 것이다. 다시 그 길을 답습한다.
시간 반을 넘게 통화를 한 것 같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주께 아뢰며, 그럼에도 이런저런 연결을 주께 의뢰한다.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작 중3짜리 아이 때문에 속을 끓이고 연애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어려워서야. 내가 저이에게 무슨 말을 한들. 내 소리로 말을 한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주가 말씀하시기를. 그저 듣기만 하며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 24:8).” 그러므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닫힌 문은 벽이다. 벽과 다를 바 없는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9).”
여전히 미루고 있는 저에게 그때가 지금이라고 말해주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오늘 우리의 통화가 결코 우연이 아니고 괜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또한 스물네 살, 저의 딸애에게 나를 소개하고 어찌 연락을 하게 할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나님이 다음 이야기를 어찌 쓰실지, 그 내용이 어떠한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문들아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그래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이가 나의 지질함으로도 주의 일을 이뤄 가시는 것이었으니, 나는 그저 듣기만 하거나 내가 만난 나의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일이었으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결코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감정이 상하고 또는 저이보다 더 울렁거려 비루하게도 안정제를 의존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10).” 그럴 수 있게 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려고 오늘 나를 여기에 두시고 이처럼 사용하시는 것이었으니.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12).”
내가 나서서 마음을 기울이면 영락없다. 내가 마음을 기울인 만큼 어그러져 더 아프게 나를 찌른다. 결국 내 안의 ‘갈대 지팡이’가 나의 공연한 안달이었고 조바심이었다는 걸 매번 당하면서도 또한 의지하다 손을 찔린다. 마음이 아프다. 중3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저 누이의 안타까운 상황을 어쩌나? 그 딸아이의 역반응을 염려하면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기도뿐이라는 것. 마음에 두신 이가 그리 볶여 주를 부르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결국 매일 매순간 나의 문을 열어야 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7).” 누구더러 대대거리며 저에게만 들려줄 말이 아닌 거였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 오늘 우리의 전쟁은 영적인 일이라. 고작 아이가 잘 되고 건강하여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사는 정도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부디 나의 영혼이 먼저 들릴지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7-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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