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전봉석 2018. 10. 31. 07:12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요한계시록 10:9-10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말씀으로 산다는 일은 그럴듯해 보이나 실제 그 실천은 고되다. 싫증나는 사람을 주의 이름으로 상대해야 하는 일에서, 내 안의 싸움은 보통이 아닌 것이다. ‘갖다 먹어 버리라.’ 다소 강압적인 어조의 이 말씀이 그래서 더 가깝게 다가온다. 고상을 떨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아한 일도 아니다. 입에서는 꿀 같이 달고 배에서는 이를 소화시키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전에 같으면 그저 그러려니 안 보면 그만이었을 일인데, 자꾸 곁에 두시니 떠밀어 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갖다, 먹어, 버리라.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겔 2:8).” 성경은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게 없다. 건성으로 보아 넘길 때는 멋지고 근사한 표현인데 이를 삶 가운데 실천하는 일이란, 내가 아는 방식으로는 안 되고 여태껏 살아와 몸에 익은 습성으로도 안 된다. 남들 다 그러는 일상으로도 안 되고 아무도 뭐라 하는 이 없다고 소홀히 여길 일도 아니다.

 

패역한 땅에 살면서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라니! 그러자니 내 입을 벌리고 주가 내게 주시는 것을 먹어야 한다. 이는 때로 강제적이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9).” 나를 붙드신 손이 있다.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질병이고 때론 궁벽한 살림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성격이다. 이는 답답한 구속이었다가 나에게만 두시는 에덴 같다. 나를 붙드시고, 그 손에는 말씀이 있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10).”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 내가 할 말이 아닌 것에 내가 도취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곧 말보다 못한 삶인데 그럴듯한 말로다 누추한 삶을 덮으려고만 할 때도 있다. 종종 나는 이와 같이 묵상글로 쓸 수 있는 말의 무게 만큼만이라도 살고 싶다. 누가 들으면 ‘좋은 일 하시네요.’ 하는데 나는 그 말이 늘 아프다. 하는 게 없고, 하는 것도 제대로 하는 게 아니어서 나만 부끄럽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되었다. 늘 죽는 소리만 하는 것 같아 내 이야기는 자꾸 걷어내려고 하는데도 애통함뿐이어서 주께 아뢰고 구할 일밖에 없다. 뭐 하나 내 맘 같지 않다. 아이를 대하면서도 뭐 좀 나아지는 게 있어야지!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다가고 그러니 어쩐다? 더는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슬픈 아이나 아픈 아이나 둔한 아이나 모두 그 사정이 고약하여 나만 애곡한다. 정작 저들은 알기나 한 것인지, 조금 정색을 하고 그와 같이 말하면 토라진다. 오해뿐이다. 마치 내가 어떻게 좀 해보려는 걸 하나님은 막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는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1-3).”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역설적이기도 하고 이율배반적이기도 하다. 고약하다.

 

먹으라, 먹고 가서 말하라. 그래서 뭔가 말하려 하면 서로 뒤틀린다. 감정이 상하고 오해가 일어난다. 괜한 소릴 하는 것 같아 안 하려고 들면 내 속이 끓는다. 이처럼 나만 오물거리며 간직하는 묵상글은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은데, 그래서 말하자면 저는 싸우자고 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옹색하여 뭐라 이를 말도 없고, 내가 먼저 상한다. 고작 중3 아이 때문에 이러는 게 우습고, 아픈 아이를 상대로 내가 속을 끓이는 게 가당치도 않아 보인다. 그래서 아이엄마를 상대하는 일은 힘에 부친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려고 하면 도리어 내가 아프다. 저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싸우자고 든다. 나는 말과 말 사이에서 어지럽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늘어가면서 외롭기도 하다. 그런 마음에서 요즘 주시는 말씀은 웃긴다. 다 지난 일인데, 더는 가망이 없는 상태인데, 이삭을 낳았다. 저의 이름은 웃음이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신다. 없었던 것이 완전 새로 생기는 것이 뚱딴지같은 만남이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정리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나의 상식과 이해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중3 아이가 왔다. 느닷없는 방문이었다. 요즘 아이로 인해 생각이 많다. 아니, 마음이 불편하다. 말 귀도 통하지 않고 기껏 했던 말을 엉뚱하게 들어 별 소릴 다한다. 오지마라, 가라, 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열리지 않는다. 뭐라 한들 자꾸 말을 비틀어서 듣는다. 비튼 말은 엉뚱한 이해를 낳고 자기변호에 급급하다. 꼴랑 내가 지금 중3짜리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의 일은 아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집안과 저가 살아온 날들과 나의 고집과 내가 살아온 아집이 뒤엉겨 복잡하다. 아주 간단한 건 싹둑, 잘라버리면 그만인데 하나님은 또 그걸 원하시는 게 아닌지 자꾸만 와서 붙는다. 진실로 진실로 거듭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단념을 하고 체념을 하려 할 때인데, ‘갖다 먹어 버리라.’

 

말씀 앞에 종종 당혹스럽다. 하긴 하나님을 설명해서 알려줄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어디서 보고 들은 것으로 전부라 여기는 것에 대해 뭐라 한들. 그럼에도 ‘말씀하신대로, 행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 21:1).” 그러니 내가 붙들 것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서이다. 늘 나는 기다렸다가 포기하기 일쑤다.

 

기도했다가 의심하는 게 일이고, 나섰다가 물러서기를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보셨고, 행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을 입에 물고 있기는 단데 삼키자니 소화하기가 어렵다. 나는 내 속이 볶여서 슬그머니 안정제를 찾는다. 그러다 아이가 돌아가면 마치 실신을 하듯 소파에 널브러져 깜빡 잠이 든다. 고단한 것이다. 그만큼 긴장이 됐던 것이다. 자꾸 똥이 마렵고 배가 아프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3).” 저는 웃음이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신다.

 

보면 이삭은 영웅도 아니었고 모세나 다윗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다. 단지, 웃음. 일상의 소소한 놀라움이었다. 분명한 것은 저로 인하여 모세도 다윗도 생겨났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아무리 어떠니 해도, 약속의 씨였다. 나름의 발상으로 얻은 엘리에셀도 아니었고, 다른 변통으로 구한 이스마엘도 아니었다. 싫든 좋든 나는 나의 일상에서 나에게 허락하시는 일로 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보잘것없고 별 볼일 없는 처지라 해도.

 

갖다 먹어 버리라, 하는 말씀으로 내내 씨름하는 어눌한 사람이다. 모르는 바 아니었다.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신 말씀을 되새기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럴 줄 몰랐다. 공연히 마음 쓰고 더 신경 썼던 아이는 어그러진다. 이만하면 됐겠나? 싶으면 여지없이 뻐그러졌다. 나만큼 기도하고 의심하고, 기다리다 포기하는 위인이 또 있을까?

 

포기할 때쯤, 행하셨다. 이삭이라니! 나를 웃게 하신다. 되도 않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뭐라 상대하고 자꾸 말을 내는 게 성가실 정도인데. 결국 나섰다가 또 비참한 마음만 들어 물러서려 하면, 이삭이다. ‘말씀하신 대로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다.’ 그러는 동안 나 혼자 제풀에 의심하고 회의하고 포기하며 돌아서기를 숱하게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니! 나는 실제 할 말이 없다. 하는 게 없다고 말하는 게 괜히 겸양을 떠는 게 아니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제야 나의 소원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정작 저 아이로 인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일에서 얻은 성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가시적으로는 늘 빈손이다. 아무 것도 없다. 되레 빙충맞다. 닭 쫓던 개 꼴 같다. 공연히 마음 쓰고 더 잘한다고 잘하면 영락없다. 나의 부끄러움을 주만 아신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5).” 그래서 나는 이제 한 가지. 남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만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일. 이를 위해 으르렁거릴 가치가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그저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38:14).” 주가 나의 중보가 되소서. 구구거리며 주의 말씀을 쪼아대는 것으로 나는 앙망하나이다. 그러그러할수록 그래서 더 말씀 앞에 앉는다. 결국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13).”

 

하나님은 나를 웃음 짓게 하실 것이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