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전봉석 2018. 11. 2. 07:25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12:10-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땅의 시대에는 일이 지배를 한다. 여기는 파라오의 세계다. 무덤의 나라다. 죽은 자들의 땅이다. 자식을 몰렉의 신전에 제물로 바친다. 성적인 쾌락이 주술처럼 난무하다. 종교는 통제의 수단으로 쓰이고 일은 억압의 논리가 되었으며 신들은 변덕스럽고 사람들은 몰려다닌다. 430년의 애굽살이는 여전하다. 부모들은 먹고 사느라 일의 노예로 살고 있고, 아이들을 ‘아이돌’ 제단에 바쳐져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다. 저마다 귀에 꽂은 리시버에서는 현란한 주술이 흘러나온다.

 

성경은 매시대의 이야기다. 읽을수록 오늘 우리 이야기다. 내 이야기다. ‘이건 뭐지?’ 하는 맛이 난다. 애굽의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왔을 때에야 맛보았던 ‘만나’의 본래 뜻이기도 하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다루면서 나는 아이들의 소소한 변화를 본다. 가령 잠언을 한 장씩 읽게 하고 그 가운데서 와 닿는 한 구절을 선택하여 필사하고 의미를 적어본 뒤 자기 생활 속의 이야기로 가져오게 하였다.

 

이를 800자로 쓰는데 아이들이 이제 사뭇 진지하다. 낱말을 묻고 그 의미를 적용한다. 실제 있었던 자기 일이라 말씀은 생생하게 스며든다.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에서 용기를 내어 주일을 권하였다. 주일에 예배로 나오게 하였다. 같이 예배드리고 ‘형이랑 같이’ 탁구 치고, 오목 두고 놀자고 하였다. 두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그러겠다며 호응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하려고 할 때에는 느끼지 못하였던 변화다.

 

그렇듯 작은 일, 큰 일이 따로 없다. 이를 나누는 까닭은 서로 비판하고 부딪치고 거칠 것을 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누가 더 나은지 견줄 요량으로 말이다. 설교원고 초안으로 본문을 옮겨 적다 그리 닿았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그리 되는 이유는 일의 노예로 사는 게 마땅하게 여기지는 애굽살이에 물들어서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도 일의 크고 작음을 염두에 두고서이다. 그러니 이미 정해진 것처럼 낙인찍히기 일쑤라. 공부 못하고 늘 뒤쳐져 시무룩하였던 아이는 그리 여겨 벌써부터 의기소침하였다. 대학은 무슨, 어디 공장에라도 취직하면 다행이지, 하는 식이다. 서로들 이야기하는 기준이 공부는 일의 질을 좌우하고 큰 일, 작은 일을 구분하여 견준다. 이제 초딩 5학년 아이들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

 

말씀 앞에서 나는 늘 신비롭다. ‘이건 뭐지?’ 하게 되는 ‘만나’다. 일에 치인 삶이 아니라 자유함으로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 종교는 통제가 아니라 자유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무덤의 나라가 아니라 산 자의 땅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교회가 취해야 할 목적이기도 하겠다. 말씀은 규율과 억압을 위한 게 아니라 자유와 안전을 위한 실재다. 마치 교통 법규와 같이 지키고 따를 때 더욱 안전한 것이다. 성경은 결코 우리를 규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런데 번번이 우린 기다릴 수가 없다. 익숙하지가 않다. 평생 노예로 살았던 날들이 몸에 뱄기 때문이다. 시내산 아래에 모여 저들은 모세를 기다린다. 조바심이 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뭔가 하려 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한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그리하여 원하는 게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하였다. 신전이 필요하고 날마다 불을 피워 제단 앞에서 의식이 거행되며 이를 토대로 자신들을 통제하고 다스리던 옛 생활을 바란다. 죽은 자들의 나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살아 움직이는 ‘아이돌’을 섬기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다. 바로의 땅에서 저들의 신은 바로바로 응답이 있었다. 통제와 간섭이 나은듯하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우리의 신앙이 점점 의식화되면서 속됨과 거룩을 나누어 어떤 성과를 그 기준으로 삼으려고 드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실제 그와 같은 목회자상을 지향한다. 교회는 이제 그때그때마다 보상이 따르고, 세상을 능가하는 즐거움을 주고, 기다림 없이 바로바로 반응하고 응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길 원한다.

 

아이 문제로 어디 전문가, 그 분야에 신통하다는 무슨 목사의 어떤 은사를 운운하며 아이엄마는 교회를 순례하듯 떠돈다. 내게도 묻기를 어느 교회 누구 목사를 아냐는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필요한 건 하나님의 분노다. 징계다. 엄연히 말씀은 이 맛을 권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우리로 파라오의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분노는 사랑이다. 더는 참을 수 없는 헌신이시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그런데 누구도 싫은 소릴 좋아할 리 없다.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단계에 이른 경우다.

 

다 받아주고 저의 편을 들어주고 그 응석을 오냐오냐하던 단계에서는 애착을 보인다. 서로의 관계가 진척을 이뤄서 이제 뭐라 꾸짖고 바로잡으려 들면 쉽게 호응하지 않는다. 반항이 생긴다. 그 안에 불편함이 가득하다.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자기고집을 부려 저항한다. 억지를 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도 나는 기다려야 한다. 아이는 혼자 들들 볶이듯 마음이 어렵다. 인정하면 자신이 허물어질 것 같고 버티자니 좋았던 관계를 복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징계는 우리 안의 싸움을 조성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이제는 알게 되면서 그 싸움은 치열해져서 도로 애굽으로 갈 것인가, 우리를 위한 신을 하나 만들 것인가, 갈등하게 된다. 스스로 순종할 기미는 없다. 말씀 그대로 주의 풍성하신 은혜가 아니면 어찌 손쓸 방법이 없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이를 온전히 깨달을 때 그동안 자부하였고 확신하였던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몹쓸 것이었는가를 통회하게 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 그럼에도 오늘의 내가 나로 살면서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은 주의 오랜 기다리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 믿을 수 없는 중에 주를 믿어 영생의 본이 되신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을 음미한다. 아이엄마의 이런저런 우려를 이해한다. 또는 중3 아이의 저항도 알겠다. 그 속에 뒤틀린 불만도 알겠다. 병적으로 좌절하기 쉬운 우리의 영혼은 세상에 길들여졌다.

 

무려 43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에 말이다. 열여섯 해를 사는 동안 아이의 전생으로 버텨온 것이다. 스물여섯 살 아이는 그렇게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고통은 가중될 뿐이다. 우리 아이는 멀쩡하고 자신들의 삶도 뭐 그리 문제될 게 있느냐는 아이엄마의 과대망상도 붙들 길 없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7).” 주의 긍휼하심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누구와 통화를 하고, 어느 아이의 옹고집에 혀를 내두르다 나는 두 손을 든다. 그럴 때면 유치한 공식처럼, 아픈 아이가 가장 정상이다. 스스로 정상적이라고 여기며 사는 애나 어른이나 그 문제는 가히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분노밖에는 답이 없다. 우리 눈앞에 놓인 이 시대의 신, 금송아지를 마다할 재간이 없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나지 않고는 별 수 없다.

 

오늘 말씀을 나는 그리 읽는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0-11).” 밤낮없이 우리를 참소하는 자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이를 쫓아내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가 하나님의 헌신을 이룬다. 금송아지 앞에서 열광하며 자기고집에 사로잡힐 ‘비화밀교’의 현장을 상상하였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와 같은 말씀밖에는 답이 없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고 아이엄마를 설득할 수 없다. 내 안에 이는 싫증조차 버겁기만 하다.

 

그러할 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