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요한계시록 17:17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다들 사는 게 참, 너무 어렵다. 늙으신 엄마는 김장준비를 하다 팔이 부러져 아침 일찍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였다. 다 큰 녀석은 기껏 아침을 차려놓고 나왔는데도 건빵과 우유 따위로 주전부리를 하여 배탈이 났다. 서로들 힘에 부쳐 멀리 용인에서도 달려오고, 두 자매의 하루 일과는 고단하였다. 사느라 열심을 다해 사는데도 그 삶이 괴롭기만 하다. 저녁 여덟 시를 훌쩍 넘겨 용인으로 돌아가다 저는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그저 듣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하였다.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생동감 넘치고 긴박하게 돌아가는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그러그러한 일상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께 더욱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 같지 않은데도, 삶은 삶으로 삶이며 삶이었다. 일상에서 주의 임재란 이처럼 평탄함이 아니라, 나의 간구를 소용돌이치게 하심이다.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이다.
녀석은 배가 아프다며 연신 화장실로 달려갔다. 가지고 있는 위장약을 먹이고 속을 진정시켰다. 전후사정을 알기 전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배는 고픈데 배는 아프고, 뭐라도 먹어야 오후에 또 공장에 가서 훈련을 받든 뭘 할 텐데. 하여 내려가서 우동 국물에 김밥을 사왔다. 언제 또 화장실로 뛰어갈지 몰라 아이를 두고 내가 그리 하는 게 나았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처럼 곤란하고 어려울 때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간구할 수 있어서이다. ‘나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이처럼 사는 일이 가장 고단한 일이 된 것은, 생령으로 하나님의 생기로만 충만하였던 동산을 박차고 나온 까닭이었다. 하나님과 같아질까 하여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그리하여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울고 싶은 우리의 구구한 삶에서 우리가 주를 사랑함은 주께 간구할 수 있어서이다.
췌장암으로 기어이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긴 동기 목사의 소식을 접할 때면 그 사연이 더욱 애간장을 녹인다. 그러니 남겨질 젊은 사모와 세 아이는 어쩌면 좋을까? 진통제도 소용이 없어 하루하루를 고통 중에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저의 심정은 또 어떠할까? 나는 이내 생각하기를 거두고 주께 간구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달픔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데 있어 ‘그를 힘입어’야 한다. 달리 더 좋은 수를 찾아도 소용이 없다. 어떤 기적을 바라고 좀 더 나은 평안을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구한 사연 가운데서 함께 하신다. 나는 아이와의 그런저런 일상을 힘에 부쳐하다가도 아이로 인해 주시는 은혜가 큰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산 자들의 땅에서 산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시 116:9).” 주를 바라는 사람들의 삶이 큰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8).” 넘어질 것 같으나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넘어졌으나 주저앉아 있게 하지 않으시며, 다 그 가운데서 주를 바라게 하심으로 우리 일상에서의 임재라. 가만 보면 무얼 더욱 하게 하려하실 때에 넘어뜨리기도 하신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주를 바람이라. 힘내라, 기도할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칭얼거림이 무슨 유익이 될까? 오히려 침묵이 필요할 때도 있다.
말씀으로 건네시는 말씀이 귀하다. 내가 주 앞에 행한다는 것. 산다는 일. 묵묵히 주신 삶을 걸어간다는 것. 당장 그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고 죄에 빠져 나무 그늘에 숨었을 때도 하나님은 걸으셨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거니시는 하나님의 걸음과 함께 하였던 에녹의 동행이 어떤 의미인지 묵상한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 22, 24).” 심판의 엄중한 경고 앞에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든, 늘 고달프고 힘에 겨운 삶의 무게로 인한 것이든, 생사를 가르는 위중한 고통으로 인한 것이든, 그리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으로의 그 삶은 살아서 삶으로 맞이하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렇듯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두루 둘러보신다. 고난과 역경을 휘두르는 사탄도 잰걸음으로 그 뒤를 살핀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욥 2:2).” 하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3).”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삶의 본질은 평온하고 무탈하여 살기 좋은 이 땅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도하게 하는 삶, 묵상을 그 걸음으로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삶, 가만히 주를 바라며 묵묵히 주와 동행하게 하시는 삶으로의 삶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일상이 본디 주께 받은 은혜라.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시 12:7).” 이는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 그러할 때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이어서,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주 앞에서 말씀으로 위로를 삼고 새 힘을 얻게 하시는 거였다. 에녹의 동행이 그저 녹록하기만 하였겠나? 비열함이 판치고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데, 저의 동행은 주의 말씀으로만 의지하는 삶이었다.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향해 열심을 다해 달려가는 정신없는 삶이 아니라, 천천히 조금은 느리게. 느긋하면서도 슬슬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과 발걸음을 같이 하는 동행. 그렇게 보폭을 같이 하며 거룩하고 아름다움으로 드는 삶이었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9:2).” 그리하여 주신 날을 사는 게 예배다. 주를 바라며 이 고통과 어려움도 올려드리는 게 사명이다. 주께서 내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로 나는 주께 향하여 이를 뿜어내는 들숨과 날숨의 일상에서,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그의 거룩으로 옷을 입는 자리가 매순간 우리에게 두시는 삶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쁘고 금방 죽을 것처럼 얼굴이 조여든다. 서둘러 안정제를 한 알 삼키고, 이처럼 약에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으로도 주를 바라는 일.
왜 그런지. 때론 그 이유를 묻다 제풀에 걸려 넘어지기 쉬운 일상에서 주와 동행하는 일이란 '그런데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일이었다. 자꾸 어려움만 주시네, 하는 말로 은근히 하나님께 서운함을 돌리는데 나는 차마 저이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래야 주를 바라는 우리의 죄성 때문은 아닐까? 아무 일도 없을 때는 도무지 주를 의지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속성이어서,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그 깊이 위로 하나님은 운행하시는 거였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곧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계 17:17).” 오늘 말씀이 그리 읽힌다. 애써 죽 쑨 걸 남 주는 형국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그리하게도 하신다.
고달픔이다. 힘에 겨움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다. 사느라 사는 그 삶이 삶이어서 고달픈 까닭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비로소 주를 맛보아 알지라. 그에게 피할 때 복이었다. 더는 무얼 어쩔 것인가? 그렇게 우리로 주 앞에서 뛰놀게 하신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29:6).” 도저히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요지부동한 나무를 뛰게 하심이었다.
주의 음성이 광야를 흔드신다. 황량하게 메마른 땅을 요동하게 하심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8).” 한시름 놓고 좀 나아졌다 여기던 것들을 들춰 엎으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9).” 애써 살았던 우리의 수고와 노력의 결실인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시기까지 새로 일으키신다. 그의 성전에서 우리로 영광이라,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그리하여 오늘 말씀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34:9).”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자의 궁상맞은 고백으로는 볼 수 없다. 주를 경외함으로 부족함이 없다니! 이는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17).” 우리로 부르짖을 수 있게 하심이 은총이라는 데 연결된다. 고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
결국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17:14).” 고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시 34: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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