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5:4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편 32:11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듣는 일이다. 아뢰어 나의 말을 하기보다 주의 말씀을 듣는 행위이다. 누구를 생각하고 또 어떤 일을 사이에 두고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설마, 했는데 아이들이 왔다. 녀석은 누나와 한동네에 사는 친구까지 같이 데리고 왔다. 신기하게도 스물두 살 아이까지도 바짝 긴장하여 같이 예배를 드렸다.
처음이라는데 그 부모가 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훌륭하였다. 호기심에 또는 호의에 끌려 처음 온 것이겠으나 말씀이 저들을 붙들어주시기를. 사뭇 진지하고 또 조심스러워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기특하였다. 너무 공부를 못해 주눅이 든 남매는 맞벌이하는 부모의 궁핍한 살림으로 한쪽에 몰려 있는 형국이었다. 마침 우리 스물두 살 청년아이가 같이 응대하며 탁구도 치고 놀아주어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런 거 보면 기도는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 아닐까? 모든 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만들어졌고 그 음성에 익숙한 해와 달과 바람과 별과 계절의 변화 가운데서 동물과 식물 또한 주의 음성이 가장 친근할 거였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가장 올바른 행위가 기도이겠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욥 33:26).”
결국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42:10).” 그래서 나는 종종 듣기 위해 쓴다. 쓰는 기도는 여백이 있어 넉넉하다. 말로하다 보면 자꾸 내 할 말만하게 돼서 때론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실제 나의 요구를 바라고 구하여 그 뜻을 관철시키는 게 기도가 아니다. 기어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것이 종종 마뜩찮을 때가 있다. 내가 원하던 게 그게 아닌데, 왔으면 하고 바라던 아이들이 아니라 너무 지질하고 궁상맞은 아이들이어서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안 올 줄 알았던 아이들이 오고 정작 올 줄 알았던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것도 희한한 일이라. 내 기도에 몰두하는 기도에는 여백이 없다. 듣지는 않고 그저 바라고 구하기만 하느라, 정작 하나님이 무슨 소릴 하시는지 듣지를 못한다.
이럴 때 오늘 말씀이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4).” 주를 경배할 수 있는 게 복이다.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게 사명이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다음에 또 보자, 하고 아이가 먼저 돌아가면서 인사를 했다. 녀석도 어린 동생들이 와서 같이 놀 수 있어서 좋았던가보다. 그렇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선입견이 또는 기대와 바람이 우리로 그릇 행하게 한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이 당연한 이치가 번번이 거꾸로 세워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순순히 한 영혼을 마주하고 대하는 일은 결국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녀석이 달라지니까 누나를 데려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란히 같이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저 묵묵할 따름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주를 바라며 산다는 일은 종종 우리를 헷갈리게도 한다. 이게 맞나? 겨우 이 정도여도 되는 일일까? 하는 어떤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런 우리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그 일은 뭔가 남들의 이목을 끄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산다는 일은 그저 주의 음성을 듣고 사는 일이다.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게 기도다. 그래서 그릇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타종교인은 물론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듯 기도를 한다. 실제 자기 소원을 비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안에 듣고자 하는 잠재된 본래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촛불을 끄면서도 기도를 하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주의 음성에 갈급하여 사는 것인지.
그것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기도란 가만히 그 앞에서 기뻐하는 일이다. 그것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기도는 행위다. 동작의 멈춤이고 생각의 중단이다. 아뢰기를 멈출 때 들린다. 자꾸 바라고 구하는 것을 뒤집어놓는 일이다. 누구나 자기 소원을 말하는 게 기도인 줄 알겠으나 기도란 그리 바랄 수 있게 하시는 이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시 95:7-8).” 들을 때 마음의 여러 악함이 드러난다. 내가 바라던 소원이, 나의 이상과 꿈이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하게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였고, 녀석도 어린아이들과 놀아주면서 뭔가 활기를 얻는 것 같았다.
쑥스러워하는 아이들을 향해 ‘다음에 또 보자.’ 하고 인사를 건네며 돌아서서 먼저 가는 아이의 어깨를 툭툭 치다 내가 더 뭉클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여력도 마음의 여백도 모두 하나님이 주셔서 가능한 거였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어떻게 모두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건 같은 음성을 들을 때이다. 곧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말씀이 모두 하나로 모아져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이건 뭐지?’ 하는 어떤 맛, ‘만나’를 새삼 맛보는 듯하였다.
어린아이 하나로 그 누나가 주 앞에 나온 것처럼 그 부모가 주를 바라며 영접할 날이 오기를.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4-5).” 그런 마음도, 생각도 모두 주의 음성이어서. 듣고 보니 참으로 익숙하였고 가장 선호하는 소리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내가 느끼는 것이 저 아이들에게도 들려질 수 있다면. 내가 듣는 이 음성이 저 아이들에게도 보여질 수 있다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7-8).”
주께서 더하시는 날 동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그리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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