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15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시편 33:20
손에 들고도 깜빡하여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에 나도 놀란다. 금방 버스 카드를 손에 쥐었다가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지갑을 뒤지며 화들짝 놀라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렇게 아이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나는 조금 멀리 산책을 하였다. 덩달아 긴장을 해서 그런가,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오색찬란한 낙엽들이 길가에 나부껴댔다. 응달진 곳의 공기는 차가웠다. 사람들도 제각각이라 한 여자는 무슨 사연인지 다 알아들을 만큼 잠깐 같이 걷는 동안에 요란하게 통화를 하였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아이가 제일 정상이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힘들 땐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되뇐다. 전혀 엉뚱한 설명과 대답이지만 그 마음은 곱다. 정작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상의 부끄러움으로 우리가 부끄러워한다. 1966년 존 레논은 곧 기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저의 노래는 신화적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저의 말은 틀렸다. 저는 결국 자신의 말이 옳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었다. 여전히 그리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과연 정상인가?
아이와 함께 시편을 읽고 작문을 하고 기도를 한다. 색칠을 하고 초등 4학년 과정의 수학 익힘을 풀고 기초 영어단어를 외운다. 돌아서면 까먹는 일이지만 아이는 누구보다 주를 바란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주의 속죄하심이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세상이라.
요한복음을 읽은 뒤 우리는 시편을 펼쳐 기도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산문과 달리 운문은 고백적이다. 묘사와 진술과 설명으로 이루어지는 산문은 그 가운데 이야기를 갖는다. 그러니까 산문은 바깥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언어다. 하지만 시는 우리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언어다. 어느 학자는 그래서 시편을 ‘성경의 창자’라는 표현을 했다. 시편이 없었다면 우리 기도는 허황되고 늘 주제넘을 거였다. 기도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요구다. 일방적인 지시가 되기 십상이다.
기도처럼 하나님을 조종하려 드는 수단이 또 있을까? 시편은 여기서 우리의 주제넘은 짓거리를 멈추게 한다. 주제넘은 기도란 변덕스럽고 자기감정에 이끌리는 기도다. 애타하고 간절하나 허세를 부리고 호기를 떤다. 마치 맡긴 걸 내어놓으라는 식으로 손을 내민다. 안 주면 강박적으로 치를 떤다. 자기고백 위주로 무조건 들어달라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난감하게 하는 기도다. 말이 기도지 명령이나 조롱이다.
이와 같은 기도의 울타리를 세워놓으시려 시편을 성경 가운데 두셨다. 나는 아이와 함께 시편을 읽는다. 읊조리다 서로 좋은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 여러 번 음미하고 이를 노트에 옮겨 적는다. 어제는 시편 37편 3-4절이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주를 의뢰하는 것이 기도의 본분이다. 나의 마음을 다하는 게 선을 이룬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의 성실함을 우리의 먹을거리로 삼고 산다. 그럴 때 주로 기뻐한다. 주께서 내 소원을 내게 이루신다. 그냥 이렇게 따라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기도다. 즉 시편은 우리의 기도가 주제넘은 요구가 되지 않게 하려고, 말씀을 울타리로 둘렀다.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게 바깥 것을 막지만 또한 우리 안의 것이 함부로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지 못하게도 하는 것이다. 바랄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산문과 달리 시는 고백의 언어다. 내 안에서 끓어오른다. 어떤 묘사도 아니고 무엇에 대한 진술도 아니다. 어쩌겠다는 설명도 필요 없다. 아이의 기도는 간절하였고 그의 횡설수설함이 고스란히 기도가 되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전에는 들리지 않던 남의 기도가 들린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목사가 되기 전부터였나?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서일까? 누가 기도를 하면 그 내용이 귀에 들리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횡설수설 아이의 기도는 두서없는 것 같고 무슨 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 같으나, 아이의 간절함이었고 주를 바라는 영혼의 음성이었다. 시편은 이처럼 우리 기도의 울타리를 든든히 해주는 것이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39-40).”
아이는 당황스럽고 불안할 때 주기도문을 외운다. 그런 모습이 온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지만, 카톡 중에도 ‘목사님 같이 주기도문 외워요.’ 하면서 앞뒤가 섞인 주기도문 한 구절을 적어주기도 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이를 이렇게 읽어도 되나? 아이의 기도는 자신에게 맡기신 세상과 화목하려고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저의 기도가 시편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구속의 가장 보편적인 이유가 그것이지 않나?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6).” 아이의 병명이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그로인한 심신미약자의 범죄가 뉴스에 오르내릴 때마다 나 역시 두렵다.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두렵고 나 역시 불안해하여 두렵다. 아이를 바르게 건사할 수 있을지 두렵고 아이가 언제쯤 좀 나아질까 기약이 없어 두렵다. 그러니 무얼 붙들고 기도할 것인가? 자칫 나의 바람과 요구만 나열하였을 기도이다.
우리는 하루에 한 장씩 그렇듯 시편을 읽으며 기도를 익힌다. 자기를 대속물로 주신 이가 우리의 기도 가운데 계신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9).”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기도의 질을 향상시킨다. 결코 좋을 리 없는 어려움이지만 어려움을 통해 시편의 기도가 내밀한 우리 영혼의 소리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오후께 영화 <바울>을 보았다. 너무 극적이고 저처럼 최악의 상황에서 단련된 언어가 성경의 언어이다. 얼추 2세기가 지나서야 사복음서가 완성되었다고 하니, 성경의 저자들은 몸으로 쓴 언어를 가지고 우리 곁에 있다. 저처럼 비극적이고 악랄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기독교는 살아남았다. 존 레논은 최소한 성경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곧 기독교는 소멸할 것이라고 장담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틀즈의 선율을 사랑한다. 한데 거기에는 최소한 아이의 간절함도 못한 무의미한 감상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다.
시편은 우리의 간절함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이 그저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일깨운다.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한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이처럼 말씀 앞에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영혼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몸뚱이를 입고 사는 터에 감이 떨어지는 우리에게 일깨우신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 33:20).”
몸은 혹하고 마음은 들떠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향하곤 하지만,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21).” 무엇을 의지하여야 하는지,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2).” 무엇을 바라고 구하여야 하는지를 시편은 먼저 기도에 앞서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를 울타리로 삼게 하려고 말이다. 우리의 기도가 행여 주술처럼 나열되고 감상적인 멜로디로 흘러버리지 않도록.
자기고백에 겨워 꺼이꺼이 토해내는 신음소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변덕스럽게 언젠 또 죽을 것처럼 바라다가 어느새 시들해지는 소원이 되지 않도록. 그토록 애타하던 게 부담스러워지기 일쑤고 장담하던 마음이 제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시편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의 습성을 하나님께 이야기하도록 그 길을 터준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듣기보다 묵묵히 준행함으로. 때론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그래서 더욱 묵묵히 주만 바랄 수 있도록.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입만 열면 자랑질인데 나의 자랑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시편은 우리가 무얼 사모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그 맛을 알게 하신다. 하여 우리의 기도는 요란하지 않다.
다만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시 3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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