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계시록 20:1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37:5-6
때론 명징한 말씀 앞에서 두렵기까지 하다. 그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의 삶이란 어떠할까? 그 삶을 우리가 예단할 수는 없으나 종종 가늠할 수는 있겠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삶이란 게, 결국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중문화이다. ‘아이돌’은 말할 것도 없고 게임에 온갖 유혹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가 참 안타깝다, 하고 보면 영락없이 그 부모가 교회를 다녔던 경우가 많았다. 하나님을 저버린 데 따른 그늘이 자녀들의 삶에 고스란히 배는 것이다.
대학 동기들 카톡방에 전혀 누군지 기억도 못할 이름도 있었다. 그 중에 누가 이름을 세 번이나 개명을 하였다며 서로들 한참 그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떤 병으로 인해 무당을 찾았고, 그렇게 바뀐 이름으로 서로들 몰랐던 것이다. 문득 저의 아담하고 예쁘장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다들 오십 줄을 훌쩍 넘겼으니 그 애환이 남다르기는 하겠으나, 서로의 구구한 이야기를 눈으로만 보며 뭐라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니 다들 사느라 찌든 영혼이었다.
무엇을 하고 어떤 지위를 얻어 살고 있든지 그 선은 명확하여서, 그럴 때면 나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말씀을 준비하다가 곁눈질로 열어보았던 카톡방 내용이 그 의미를 더하는 것 같았다. 누구 이야기가 또는 저들의 사연이 교훈을 더한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란 게 황망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누구는 뒤늦게 문학으로, 누구는 여지없이 철들지 않은 어른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생명책에 기록된 자’의 삶은 선명하여서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산다. 그 가운데 소망을 붙들고 나아간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주로 저들 대화를 보고만 있는데, 목사로 사는 게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란 생각을 하였다. 끼어들지 않아도 되고 끼어들 수도 없는 삶이어서 말이다. 오죽하니 두 번씩이나 이름을 바꾸면서 살아왔을까? 여전하여서 사는 데 따른 어려움을 서로가 위로하고 있는 것이니, 그래서 술 한 잔들 하자며 자리를 꾸렸다.
아이가 돌아가고 설교원고를 수정한 후 소파에 널브러져 깜빡 잠이 들었다.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글방 안은 오히려 훈훈하고 아늑하여서 고요하다. 그러게. 나는 늘 겨우 한 명, 저 한 영혼으로 씨름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어쩌겠나? 내 앞에는 늘 단 한 영혼뿐이라.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 그만하면 족하였다. 내 비록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종종 안부에 답을 하는 정도여서 심심하기까지 한데 친구들은 그렇듯 챙기고 기억하고 위한다. 전과 확연히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하는 게 없는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한 것을 느낀다. 가령 아이가 기도를 한다. 횡설수설하여 나는 아이가 무슨 소릴 하는지 귀를 쫑긋 세워서 듣지만 겅중거리는 간구는 종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아이의 손을 잡고 주님, 하고 부를 때 먼저는 내 안에서 여기 두시는 이유를 알겠는 것이다. 그냥 그게 다다.
뭘 하려고 애쓰지 않고 어떤 당위적인 노력으로 강박적이지 않다. 하는 것이 없는데도 함께 있음으로 그 자체가 족한 일도 있다. 이제는 버스정류장까지 안 가고 그 가는 방향에 같이 서서 배웅을 하였다. 잘 도착했는지, 오늘은 어땠는지, 수고했다, 하면서 위로의 말이나 안부를 한 번씩 건네는 정도가 전부이지만 우리 안에 두시는 이 마음이 그 자체로 귀한 사역이 되는 것을 알았다.
아내와 앉아 누구 이야길 하고 그 아이에 대해 관심을 두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에서 우리의 기도는 항상 진행형인 것이다. 더는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 안타까움으로 그 부모를 또는 가정을 두고 생각하고 말하고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이 주께 아뢰는 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누굴 생각하고 어떤 말을 듣는 일만으로도 우리의 존재감은 이미 발휘되고 있는 거였다. 어제는 문득 그렇게까지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누군 이름을 세 번씩이나 개명을 하였고, 누구는 여전히 등단을 위해 글을 쓴다며 꾸물거렸고, 어떤 아이는 마음이 벌써 떠나 날짜를 채우러 오는 게 눈에 띄었고, 똥싸개 아이는 혼자 씻다가 화장실에서 머리를 찧었고.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더는 우리 사이에 이야기가 거론되지 않는 아이도 있었으니, 그렇게 지나가고 또 새로 오는 것인가. 나는 그것까지도 주가 이루시고 행하신다고 여겼다.
이렇게 오늘 아침, 이 명징한 말씀 앞에서 중심을 잡는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이는 추측이 아니다. 예단도 아니다. 확실한 사실이다. 예외는 없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2).” 그 기록이 오늘 이 한 순간순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것이 되겠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다가 순간 안도하는 마음이어서, 나는 이 명료한 말씀 앞에서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주가 이루시고 주가 나타내시고 주가 하신다. 그러니 괜히 내가 불평할 일은 없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1).”
오히려 저들이 안 됐고 불쌍하여 아무도 모르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지나가는 어느 노인의 노구를 보며 안타까움에 주님, 하고 되뇌는 일. 이는 주의 성실하심을 먹을거리로 삼고 사는 가장 의식적인 일이 되겠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3).” 이제 이 땅에 머물 날이 이 땅에 머물렀던 날들보다 적어지는 날들이어서, 그러므로 더욱 주 앞에 온전하기를. 행여 나의 남은 날이 버려지지 않도록, 나는 소원한다.
도대체 이 아이와 이러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다가도 그게 곧 내 일이라. 나에게 두신 사명이라.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주의 성실하심을 먹을거리로 삼는 일이었다. 미덥지 않아 내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오지랖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나는 이제 확신한다. 전혀 생소한 이름이라 한참을 낯설어하다 문득 떠오른 예쁘장하고 단아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저의 촌스러운 이름에 더욱 정감을 느끼는 일이었지만.
우리가 얼마나 애를 쓰고 기를 쓰고 바동거리며 살아왔는지. 그러나 그러는 동안 우린 과연 무얼 얻었고 얼마나 잃으며 살아온 것일까? 얼굴이 떠오르자 나와도 꽤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는 걸 기억했다. 체육대회 때나 학교 축제 때 둘이 앉아 장난치며 꽤 긴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고 지금도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한참 대화가 길어진 다음에야 문득 기억이 나서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가만히 내가 기억하는 저를 떠올리며 주님, 하고 되뇌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 이보다 더 복되고 귀한 삶이 또 있을까? 맡기고 의지하고 사는 삶보다 나은 게 없다. 어쩔 땐 저들 대화방에서 나올까 하다가도 그대로 있는 듯 없는 듯 남아있는 것은 어떤 그리움 때문도 아니고 누구와 친해서도 아니라, 그렇듯 문득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내 일이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7).” 저들의 잘됨도 혹은 못됨도 모두 우리의 기도 제목이었다. 그냥 그렇게, 주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놓아두시는 것이라. 그 걸음을 누가 어찌 알겠나?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 보면 그래도 믿는 친구와 안 믿는 친구는 달라도 뭐가 달랐다.
이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25).” 보기엔 똑같이 구질구질하게 모진 삶을 살아온 것 같으나 그렇듯 버려두고 걸식하게 두시지 않는 부류도 있는 거였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으면서 나는 다만 주를 바랄 뿐이다. 아이와 무얼 대단히 이뤄내는 사역도 아니지만 하는 듯 마는 듯 그러나 묵묵히 내게 두시는 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성도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주가 하신다. 다만 그의 성실하심을 먹을거리로 삼고 산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4).”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0) | 2018.11.12 |
---|---|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0) | 2018.11.11 |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0) | 2018.11.09 |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0) | 2018.11.08 |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0) | 2018.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