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요한계시록 22:10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37:5-6
누구 뭐랄 거 없다. 점점 이 시대는 각기 자기의 삶을 살뿐이다. 불의한 자는 불의를 행하며 더러운 자는 더러운 대로 의로운 자는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말씀은 열려 있고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시대여서 더는 몰랐다고 말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그리 인도하심으로 말씀 앞에 나아오게 하신 데 대하여 저도 나도 그 시의적절함에 놀라워하였다. 제대 말년 이제 거의 매주 휴가를 나오면서 자기개발을 해야 하는데 무얼 어찌 해야 할지.
그래도 군대 안에서 늘 주일을 지켰고 주께 향한 믿음이 온전하여서 나는 아들처럼 저를 위하고 대하고 있었다. 서로가 어찌 지내는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생활은 어떠한지, 서로 문안하는 자리가 또한 성도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모두가 돌아간 뒤 우리 둘은 남아 모처럼 길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어떻더라, 어느 교회가 어떠한가, 하는 일에 연연할 거 없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0).” 때가 가깝다는 건 그처럼 어지러운 날들이겠으나 또한 말씀도 열려 있으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 거였다. 들을 수 있을 때 들어야 하고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을 때가 지나기 전에 묵묵히 의를 행하고 거룩하라.
말씀 앞에 그 의미를 묵상하게 된다. 한참 생각이 많을 때였다. 2월 전역을 앞두고 3월에 바로 복학을 하여 전공인 심리학만 할 것인지, 복수전공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으니 경영을 같이 할 것인지, 둘 다 하려면 깊이가 없을 것 같고 하나만 하자니 앞날이 어찌 될지 몰라서 녀석은 의외로 생각이 많았다. 그러니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아차, 하는 순간에 간다. 믿음 잃지 마라. 신앙 접지 마라. 단도직입적으로 그 부모의 불신앙과 사귀는 아이의 타종교에 대하여서까지 언급하였다. 설마, 하면 어느새 저만치 물러나는 것이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일이 또는 어떤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사는 일이 보람될까, 하는 것의 표준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자. 주 앞에서 은총을 붙들고 살자. 순종이 그 어떤 종교적인 신념보다 낫다. 모처럼 아이와 허심탄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지.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 주가 붙드시지 않으면 허사다. 주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모든 게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서로 다짐하듯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마침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주인 사장이 나와 차 한 잔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저의 삶은 궁리 중이다.
채 한 달도 안 하고 마사지가 그만두면서 그걸 또 반으로 나눠서 작은 사무실로 임대를 놓을까 한다며, 자신도 내년 4월이면 나가야 할 거라면서 그 자리도 임대를 새로 놔야 하고, 이래저래 늘 보면 궁리하고 또 궁리 중이었다. 아내의 신앙은 어떠한지, 어머니는 좀 괜찮으신지, 평소 궁금해 하던 것을 물을 새도 없이. 사업이란 그래서 늘 어디에 정신이 팔려 사는 일이었으니. 마치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22:11).” 오늘 아침 말씀이 말이다. 나는 저 어쩔 수 없음이 두렵다. 아무리 뭐라 해도 불의한 자는 여전히 불의함으로 자신의 불의를 괜찮다고 여긴다. 그게 아닌데 더러운 자는 기어코 더러운 자신의 삶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떤 말, 서로 해줄 수 있는 말의 범위가 한정된 것이어서 그 관심의 정도가 찬양이 되고 소망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설명하였다. 찬송이란 입만 열면 흥얼거리는 것이다. 생각의 대부분이다. 몰두하는 정신의 전부이고 그래서 관심을 두는 일의 표출이다. 입만 열면 그 얘기다. 같은 관심을 갖고 어울리는 사람이, 일이 찬송이다. 누군 주식에 대해서 밤낮 정신이 팔려 있고 누구는 건물주로 임대를 놓고 그걸 운영하는 데 늘 궁리한다. 눈만 뜨면 생각하고 또 궁리하는 게 찬송이다. 그건 일의 범위가 아니다. 그 속성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어떤 것에 몰두하여 정신이 팔려있든 그래서 우리는 주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의 찬송이 저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다. 돈돈거리는 사회에서, 늘 분주하게 오가며 그래서 항상 피곤에 절어 사는 저들이어서, 목사님은 늘 여전하시네요. 여긴 참 좋습니다. 하는 말로 저의 영혼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바라는 바를 말하게 하는 것인데도 의지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일이 온통 이리저리 굴려 돈 벌 궁리뿐이라. 나는 저의 말을 들으면서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저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일이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9).” 우리의 찬송이 헛된 것 같으나 참 좋고, 늘 여전한 모습으로 우리는 주를 바라는 사람들이라. 그것으로 찬송이 된다. 한 명 아이를 두고 씨름하나 열 명 백 명 아이들로 북적거리나, 어떤 성과로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찬송이 저들로도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게 된다.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10).” 인도하신 이가 그처럼 또 발걸음을 주도하신 것이면 그 마음의 일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셔야 할 일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성과나 보여지는 무엇으로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하였다. 목사님은 요즘 어떠세요? 하는 저의 물음에 늘 똑같습니다. 하고 말해줄 수 있는 게 감사하였다. 나는 ‘잘 되고 못되고’에서 자유로운 걸 느꼈다.
저의 물음에 개의치 않고 그리 여길 수 있어서 기쁜 것이다. 그런 모습이 저들로 우리와 함께 찬송하게 한다.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11).” 그리고 저들도 소망을 갖게 한다.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12).” 나는 설교로 증거한 말씀이 우리 삶의 증표가 되는 것에 확신하였다. 막연하고 공연한 소리는 없다. 설교란 실제다.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착하게 살자는 다짐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고(14:1), 담당하는(15:1) 일이 결국에는 주께서 우리를 받으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나와 함께 돌이켜 같이 교회를 시작하였던 예닐곱 명의 아이들에 대한 기도와 간구는 그래서 엄연한 거였다. 다들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나름 주 앞에서 고백하고 함께 세례를 받았던 놀라운 사실 앞에 나는 종종 전율한다. 얼떨결에 시작한 교회였고 멋모르고 같이 하였던 아이들이었으며 내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게 하셨던 아이들이다.
좌우정렬 옆으로 나란히, 할 때 누군 지금 좀 곁에 누군 조금 더 멀리 서 있을 뿐 우리의 기준은 말씀이고 주의 은혜이며 은총이고 긍휼하심인 것을 나는 확신한다. 또한 이곳으로 교회를 옮겨오고 여기에 두시는 데도 다 그만큼 이유와 목적이 계신 것을 또한 잘 안다. 사장은 이런저런 구상을 하며 우리 교회가 전면 쪽으로 나가면 어떨까, 화장실과 주방이 다 갖춰져 있으니 남 주기도 아깝고 나름 배려하는 마음이었으니. 어떻게 하시려는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나는 뭐라 답을 하지 않았다.
주가 이루신다. 아이에게 그리 확신하였다. 숱한 계획을 세우고 엄청 공들여 진행하는 일이라 해도 주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허사라.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이 명료한 진리를 아이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곧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2).” 하는 이 말을 우리 건물주 사장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주가 이루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이와 같은 명료한 말씀 앞에서 이제 나는 안도하는 것이다. 늘 우리에게 그 때가 멀지 않았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곧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13).”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이보다 더 슬기로운 삶이 또 있을까?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4).” 그러하고,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 그러므로 때론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럴 때 불평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7).”
결국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18).” 이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 주가 붙드심으로 산다. 곧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4).” 이에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37).”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할 수 있는 삶이 복되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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