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8, 22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혹시나 하고 기다렸다. 안 올 거라 여겼지만 정말로 오지 않아 속상하였다. 혼자 속 끓이는 일이 싫었다. 연애하는 사람처럼 이게 뭔가 싶었다. 고작 중3 아이였다. 그동안 마음을 두고 위하였던 만큼은 고스란히 짊어지게 된 셈이다. 그런 거 보면 아내는 냉정하다. 나는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인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기질이기도 한 것이다. 딸애가 서로 생일 겸 좋은 곳에 가서 점심을 사주었다. 내내 아이 생각으로 마음이 울적하였다.
이 또한 내게 두신 일이다. 그리 여겨 마음을 쓰고, 볶이는 마음으로 자꾸 주께 아뢰는 일이 말이다. 괜히 또 일을 망쳐놓은 것만 같은 자책이 마음을 짓누르기도 하는 것이다. 뭐라 하지 말 걸. 뭐라 하면 꼭 열에 아홉은 튕겨져 나간다. 혼자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조금 먼 길을 걸어서 왔다. 바람이 차가웠다. 과연 이게 전부인가? 하는 어떤 의문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더 나은 성장을 바란 것인데, 괜히 뭐라 그랬나 싶은 아쉬움도 커졌다. 그렇게 또 일을 망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는 오늘의 말씀을 붙든다. ‘그러나’의 문제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어찌 이 일을 담당할 수 있을까? 다들 어떠어떠하다 해도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8, 22).” 은혜를 입은 자의 특징은 그럼에도, 어떠하든,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겠다. 다들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아내의 말이 더욱 슬프게 들렸다. 위로인지 자괴감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님이 오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은 우울한 것인지, 속상한 것인지 굳이 그럴 거 없는데도 아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에 오늘 말씀은 직접적으로 나를 두고 하시는 음성으로 들린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눈에 보이는 이런 세계 너머에 뭔가가 있다. 저 아이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닐 것이다. 이렇게 단절이 오고 더는 어쩔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철학자 숀 켈리는 이런 걸 ‘휙 하는 소리’로 비유했다. 누구는 ‘신성한 질서’ 또는 ‘무한의 언저리’로 표현하기도 했다. 끝난 이야기인데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다. 죽으면 그뿐인 것 같은데 결단코 죽음으로 끝이 아닌 이야기. 스치듯 ‘휙’ 지나간 사이로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오만가지 상념이 나를 사로잡는 하루였다. 이제 곧 운명하게 될 아직 마흔도 안 된 동기 목사의 이야기도 최소한 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합심하여 기도하는 젊은 동기 목회자들의 설교에서 또는 묵상에 녹아들어 주의 사랑을 더욱 체휼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흘러가고 끝나버린 사이 같지만, 나누었던 이야기와 들려주고 싶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영원한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할 때 나는 더욱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스스로 계신 이를 도대체 어떤 이해로 감당할 수 있겠나? 우리는 다만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이렇듯 허망하게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비록 이 땅에 사는 동안 서로는 더 이상 마주칠 일도 없고, 행여 다시 마주한다 해도 서먹서먹하기 그지없겠으나.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리하여 어느 훗날 주 앞에서 서로가 머쓱해하면서도 함께 주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우리는 목소리 높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함으로 서로 불러 이를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때로 그 하나님은 폭풍우처럼 우리를 엄습하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1-2).” 하면 우리는 두려워 떨 뿐이다.
그 하나님은 작렬하는 번개로 우리 곁에 계시기도 한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몸이 오그라들고 마음이 경직되어 두려움으로 말 한 마디 꺼낼 수 없는 지경에 놓일 뿐이다. 살려달라는 소리도 이젠 의미가 없어 보인다. 차라리 평안히 데려가주시기를 기도한다. 한데 어제 묵상하였던 말씀처럼 결코 우리의 슬픔이 또 이 괴로움으로 뒤집어 쓴 재가 반드시 기쁨의 화관이 될 것이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모든 개별적인 슬픔은 한데 어우러져 그 영광을 나타낼 재료가 된다. 종종 우리는 그 맛을 이 불완전한 생에서도 맛보아 아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순간에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더 사모하는 것이 있었으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9).” 말씀을 묵상하고 음미하는 데서 그 맛을 보곤 한다. 아직은 미숙하고 너무 찰나적인 것이라 지속적이지 못해 아쉬움이 크지만,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잠 24:13).” 다른 더 좋은 걸 나는 이제 알지 못한다.
아이 때문에 속을 끓이는 일이 죽어가는 이의 애태움과 어찌 견줄 수 있겠으며, 어떤 서러움이 또는 괴로움이 저를 지켜보며 가슴을 쥐어짜는 그 가족의 심정과 비교나 될까만! 나는 좋은 음식점에서 맛있는 걸 먹으면서, 어떤 슬픔이 또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생각이 깊어졌다. 그렇듯 불완전한 세상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인가? 되돌려 다시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 어떤 값을 더 치르더라고 살려내겠다는 의지? 그저 그렇게 살려주세요, 하고 바라는 맹랑함?
하나님은 종종 우리 인생에서 우슬초보다 쓰시다. 너무 하신다. 억울한 것도 같다. 좀 야박하신 것도 같고 매정한 것도 같다. 이를 어찌 사랑의, 인애가 풍성하신, 인자한, 자비로운 우리의 하나님으로 바랄 수 있겠나? 하오니,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내가 더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너머, ‘획 하는 소리’ 같은 어떤 찰나적인 순간의 환희를 영원히 잃지 않을 것임을, 맛보아 알지어다. 성경은 그렇게 나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다 저녁에 녀석은 장문의 일기를 적어 올렸다. 나는 일찍 누워 아이의 일기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기를 썼다며 녀석은 카톡을 하였다. 아이의 글은 난해한 미로 같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 길을 잃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집중을 하고 읽어주고 다시 응원을 하는 일이 오늘 내게 두시는 역할 중 하나일 거였다. 형이 왔고, 엄마는 바빴으며, 혼자서 보드를 타고 거리를 배회하였던 내용이 섞여 있었다. 주일 날 엄마가 와서 같이 학습세례를 받는 자신을 축복하기로 하였다고, 즐거우면서 두려운 마음을 글로 썼다.
이렇듯 다 죽은 것 같은 둥치에서 새순이 날 소리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더는 황폐하여 다 망가져버린 것 같은, 모든 게 잘려나간 황무지 같은, 둥치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결실을 할 것이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0).” 더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인데.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10:33-34).” 모든 게 다 끝장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것으로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누누이 알게 하신다. 거기에서 새순이 날 것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겠나? 주의 영이 그 위에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2).” 내가 다 망쳐놓은 것 같은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획하고 섭리하는 바 이루어가고 계시는 일이 있었으니,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4).”
반전이다. 전혀 예상치 못할 그러나 마땅히 이루어질 나라이다. 그것은 평화다. 우리의 번잡스러웠던 마음을 평안히 누리고 쉬게 하심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6).” 곧 이 모두는 하나님이 이루실 땅,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
이를 훗날에 이르러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구하였고 증거하였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시 11:10).”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그 어느 것도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더는 이어지지 않을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한 이야기다.
그날이 오면 여기서 더는 읽지 못했던 이야기가 이어지고 이어져 영원히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2).” 당장은 슬픔이 곧 괴로움이 우릴 옥죈다 해도,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그리 구하고 바랄 수 있게 하심이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땅이 있을 동안에는 (0) | 2018.11.20 |
---|---|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0) | 2018.11.19 |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0) | 2018.11.17 |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0) | 2018.11.16 |
복이 있도다 (0) | 2018.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