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7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편 41:1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선한 일을 한다고 여기지 않을 때이다. 악한 일을 한다는 것도 악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때이다. 선이란 주를 바라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수직적인데 이를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면 덕을 세움으로 우리의 수평적인 삶이 얼마나 곧고 너른가 하는 데 있겠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그러므로 선이란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써,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더불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게 덕이다. 먼저 구하면 더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은 내가 구하는 일이고 사람들 앞에서의 덕은 그러므로 더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내가 추구하는 게 아니었다.
덕을 위한 덕은 없고 선을 위한 선은 없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은 악을 경계로 하고 덕은 선을 바라는 곳에서 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선이라 하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이는 경계다. 최소한의 자리다. 세금을 떼듯 의무가 아니고 그만하면 되는 당위도 아니다. 하나님의 것, 그 전부.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 2:2).”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은 의미로 읽힌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정도여서 그리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안다.’ 앎으로 두려워할 줄도 안다. 두려움은 경외심의 표면이다. 우와, 하고 놀라는 경탄의 자리다. 그래서 나는 없고 오롯이 주님만이 드러난다.
우리의 담대함은 남들보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주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저나 나나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율례를 정하시고 그것을 지킨 사람은 모세를 위시해서 하나도 없다. 그 증표를 할례로 삼아 만일 죄를 범하면 단절을 각오하는 다짐이고 약속이었는데 아무도 이를 지킨 사람은 없다. 이로 인하여 예수께서 찢기셨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담당하셨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우린 주께 나아간다. 나의 남은 생은 순전히 그러했으면 하고 바라였다. 언제부턴가 생일이란 게 큰 의미가 없어진 뒤로 별다를 게 없는 하루였다. 마침 돌아오는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이면서 아이가 학습세례를 받는 성찬예식이 있는 날이기도 하여서 그때 같이 축하 케이크를 하기로 하였다. 이번에 시험을 끝낸 고3 아이가 안부를 물어 오려는가. 아이엄마가 오려는가. 누구를 머리에 떠올릴 뿐 주를 바라는 게 다였다.
아내는 ‘똥싸개’ 아이가 태권도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이와 약속한 햄버거를 사서 교회로 왔다. 그런데 언제 아이 아빠가 우리 글방에 와서 ‘이런’ 어린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 상담을 했었다고 한다. 너무 어려서 안 되겠다고 했던 모양인데 나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또 서로 연결이 돼 있었다! 그래서 나를 안다고 하는 말에 아내도 신기했던 모양이다.
서로 그렇듯 맡을 수 있고 보내시는 아이를 담당할 뿐이다. 주일에 예배에 나오기 시작한 초딩 5학년 녀석은 이제 좀 친해졌다고 다들 마저 쓰는 800자를 조금 못 미치게 써서 가져왔다. 안 돼, 하고 더 쓰라고 했더니 와락,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모르는 체 내버려두었다. 그래도 많이 달라진 게 더는 지랄을 떨지 않는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훌쩍거렸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마저 다 쓰는 것이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마저 다 쓰고 탁구를 치고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주께 구하는 것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할 뿐이고 그 지혜와 힘도 주께서 주셔야 할 거여서 말이다. 아이를 보고 할 수 없다. 사람을 사랑하되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보면 항상 그걸 일깨우신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되 그 선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따른 덕이지 이웃을 위한 이웃을 향한 게 전부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아이라도 너무 싫다. 하는 짓이 버겁고 마뜩치 않다. 내가 어쩔 수 있는 본성이 아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8).”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전부였다. 우리가 저 아이를 품고 위하고 격려하는 까닭은 단지 저 아이에게 잘해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 5:3).” 이를 어찌 감당할까? 어느 것 하나를 어겼을 때 모든 것을 지키지 못한 게 되는데 무슨 수로 선을 이룰까?
다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삶으로 사는 일밖에. 그것은 다만 주신 자리에서 두시는 것만큼 주 앞에서 충실하면 될 것인데, 것도 내가 하려고 애써서 하는 게 아니라 그리 되어지게 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법이라. 내 속에 두고 내 마음에 기록하여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으로. 어떤 아이들이 오고, 그 아이들이 감당하기 힘든 어떤 사연을 듣고, 이에 힘겨워하는 아이를 곁에서 보듬고 주의 사랑으로 함께 하는 일.
그 시간만큼은 내 속에 두시는 것으로 나는 연애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자꾸 쓰인다. 내 마음에 기록하시는 일이라. 효자손으로 아이 얼굴을 갈긴, 엄마의 폭압적인 기질 때문에 아이는 학교에서도 왕따다. 혼잣말을 하고 저 혼자 즐거워 헤헤거리는 게 좋게 보면 귀여운데 나쁘게 보면 섬뜩하다. 그러니 우리가 아이엄마를 나무랄 것인가, 아이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그저 품고 또 품어서 알려주시는 만큼 위하고 다독이며 그게 전부인 것을.
우리의 이야기는 매일 그 타령이라. 어제 나의 생일 날, 똥싸개 아이와 햄버거로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게 다였다. 어떤 영향을 끼칠지,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오늘 시편은 우리 곁에 둔 ‘가난한’ 영혼을 보살피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사람 사이 뭐 있나?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9).”
내가 애쓰던 사이는 보란 듯이 나를 외면한다지만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그래서 더는 바랄 것도 없고 갚을 능력도 안 되는 아이들을 위하고 마주하는 일이라니! 주를 마주하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이다. 금세 토라져 밉상을 떠는 아이나, 그처럼 애써 마음을 기울였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사이가 다반사인 경우에도, 다시 또 우리 곁에 두시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일이라니.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이란 그런 거였다.
이것으로 죄를 다스리는 일이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늘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을 무슨 수로 다스리며 살까? 온전히 주를 바람으로, 주만 의뢰함으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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