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전봉석 2018. 11. 20. 07:09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22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오전 10시경 신대원 동기 목사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아이는 여느 날보다 우울감에 젖어 시무룩하였다. 아이엄마는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 당부를 하였다. 전날부터 허리가 너무 아파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난감하였다.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아 혼났다.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2).” 오늘 말씀은 이를 알게 하신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4).” 곧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이러할 때 우리의 기본은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일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어찌 이를 아니다 하고 저를 좋다고만 할까?

 

다만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얼마나 수시로, 내가 내 스스로 판단하고 그 기준이 되려 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오직 주 앞에 서는 일. 그리하여 주만 바라는 마음으로.

 

다잡듯 그리 생각하고 되뇌며 주를 바라였다. 점심을 먹고 올라와 잠깐 그림을 색칠하며 찬송을 듣다 아이가 눈물을 흘렸다. 조증과 울증 사이에서 나는 아이의 감정을 추슬러야 할 거 같았다. 같이 탁구를 쳤다. 한껏 기분을 풀어주어 간신히 돌려보내고는 내가 녹초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언제 허리가 아팠나싶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내 기분을 운운할 문제도 아니었다. 몇몇 동기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지방에 있는 전도사와 통화도 하였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 우리의 싸움이 아닌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니 주를 바랄밖에. 더는 무엇도 의지할 게 아닌 것이어서 더욱 주 앞에 나아가는 수밖에. 동기 전도사의 이런저런 괴로움을 듣다보니 것도 어쩌면 다 닮은꼴이어서 마치 정석 같은 일이기도 하였다. 곧 다 때가 있나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전 3:5).”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지혜였다. 그러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6).” 슬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어서 그때마다 감정에 휩쓸려서 대대거릴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아이의 병약함이 건강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증상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그게 더 큰 문제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음 앞에서 주를 바라였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7).” 우리 앞에 펼쳐지는 숱한 때와 때의 연속 앞에서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자세는 그게 아닐까?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8).” 늘 어디가 아프고 어떤 어려움이 있고 무슨 괴로움으로 한시도 족할 날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아이가 웃어주는 게 감사하였다.

 

주의 말씀 앞에 확신을 더하게 되는 일이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히 1:8).” 오늘 말씀은 이를 또한 각인시키신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주께서 그리 두시는 일들 앞에서 묵묵히 주만 바라는 삶으로의 자세.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주를 바란다는 건 막연한 신앙이 아니다. 직접적인 삶이다.

 

오후께 아들이 전화를 하였다. 당분간 일을 하게 될 필리핀 대사관 근처로 이사를 하는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나는 그 수입에 있어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 엄격하게 준수해야 할 것을 일러주었다. 십일조에 관해 오늘 날 여러 교회에서 갑론을박 말이 많지만 내게 두시는 모든 게 주의 것임을 확증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이 십일조였다. 전부가 주의 것이라는 증표, 이를 적을 두고 섬기는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마땅하다.

 

임의로 나누어 몇 교회에 분산하거나 거기서 선교와 구제헌금을 떼고 감사헌금이나 주정헌금까지 나누는 따위의 행위는 모두 옳지 않다. 마치 내 것을 내가 임의로 그리해도 된다고 여기는 자체가 불순하여서 말이다. 온전히 나의 전부가 주의 것임을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십일조였다. 한참을 그 의미를 설명하고 앞으로 온전히 그리 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녀석은 엉뚱하게도 그걸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지 교회에 바치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찌 섬길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곳이다. 예수께서 그 머리가 되심이다. 교회를 우상화해서도 안 되지만 교회가 아닌 곳을 운운하면서 신앙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찌 섬길까? 내 곁에 두신 이 아이다. 오늘의 이지경이다. 날마다 씨름하는 낮과 밤이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오늘 말씀을 나는 또 그리 읽는다. 되풀이 되는 조증과 울증의 간격이며, 좋음과 나쁨의 사이이고 형통함과 어려움의 틈이다. 심음과 거둠이고 추위와 더위다. 여름과 겨울이고 낮과 밤이다. 이 모두는 주의 것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나는 허리가 아파 몸을 뒤틀고 앉아 이 말씀을 묵상한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언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내 모든 게 주의 것이라. 이를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수고로 얻은 수입을 주 앞에 내어드리는 데서 나타난다. 함부로 나누지 말고 그것으로 허튼 농간을 떨지 마라. 마치 내 것으로 구제하고 나누어 교회를 섬기는 듯 생색내지 마라. 다 주의 것임을 증거하는 삶이 되라. 그 기본이 십일조에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어쩌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아들과 그리 통화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것에서 어느 것도 주의 것이 아닌 게 없었다. 누가 죽고, 누구는 우울하고, 누군 아프고, 누군 고달프고, 누구는 힘에 겨운 날들이지만 이 공식은 아주 간단하였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들이 나를 성장하게 하시는 거였다. 그리 여겨져서 감사하였다. 동기 전도사의 고달픔에도 그리 말해주었다.

 

곁에 두시는 모든 게 주의 뜻이라면 괴로울 땐 기도하고 즐거울 땐 찬송할 일이다. 이 일이 우리 앞에 병행하게 하셨다. 우리로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고 말이다. 다른 수단을 찾고 더 나은 강구책을 바라는 데서 우리의 헛발질은 고달플 따름이다. 맡기신 데서 구할 것은 충성뿐이라. 어디 전임을 원해서 찾았는데 그 대우가 너무 각박하고 돌보는 누가 자꾸 염장을 지른다. 그래서 도로 파트를 찾고 좀 나은 부서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지금 그 맡기심이 그저 고단할 따름이다.

 

어쩌겠나? 대체 얼마 동안의 헛발질과 헛손질이 더해져야 비로소 끝날 우리의 광야인지! 나는 아픈 아이 앞에서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주의 도우심만 바라였다. 어쩔 수 없는 것 앞에서 별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을 흔들며, 주가 아시나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렇게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어 지지며 주를 생각하였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할 수 있는 만큼, 살 수 있는 날 동안에 내게 두시는 주의 일이라. 그래서 또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더하시는 거였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3).” 아니면 무엇으로 이겨낼까?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곧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