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전봉석 2018. 11. 21. 07:19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창세기 9:7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신발을 정리하고 있는 아이가 큰아들인 듯하였다. 덤덤하니 젊은 사모의 표정은 의연하였다. 아내와 조금은 늦은 저녁에 들러 문상을 하였다. 죽음은 언제나 여기와 저기의 경계를 분명하게 한다. ‘주어진 생을 주의하라. 이생을 다한 뒤 그 홀연함을 주목하라. 하나님께 더욱 주목하라.’ 그리 외치는 것이다. 여느 장례식장과 달리 심심할 정도로 차분하였고 안정되었다. 왁자한 술판도 없었고 산 자들의 호기어린 지껄임도 없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흔히 ‘주의 종’으로 불리는 ‘종’의 신분은 충성의 함의를 지녔다. 겸손과 낮음과 순종의 함의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값을 지불하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셨다. 종으로 이 땅에 오셨고, 종으로서 우리에게 섬김의 본이 되셨다. 종은 늘 무언가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에 잠들기까지 종은 늘 주인의 뜻을 살핀다.

 

죽음을 맞은 유족의 모습도 덤덤하고 문상객들의 표정도 덤덤하여 나 또한 덤덤하였다. 그러고 보니 곡소리가 없었다. 악다구니 떨 듯 요란한 슬픔도 없었다. 사진 속 본인의 모습도 평온하였다. ‘~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성경의 이어짐이 새롭게 여겨졌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은 이와 같은 통로가 됨이 아니겠나?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그 종’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본을 보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그 하나님의 방식은 이처럼 올라가기 위해 내려오고, 낮아지고 남겨짐으로 축복의 근원을 알게 하시는 거였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문상객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집개로 각각 신발장에 정돈하는 모습이 또한 함축적이어서 말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신을 벗는다. 이는 영생에 대한 경외의 표시다. 산 자로서 최후의 예의다. 삶과 죽음의 자리에 신을 벗고 선다. 이게 전부가 아닌, 다음 세상에 대한 배웅이면서 겸공(謙恭)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제각각의 신발은 각자의 삶을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마침 신발장 근처에 앉아 나는 흩어진 신발과 가지런히 놓인 신발과 그것을 정돈하는 아이의 손길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종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아버지 하나님이 붙드는 종,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 아버지 하나님이 택한 사람,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을 주어 이방에게 정의를 베풀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상기시킨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2-4).” 하는 말씀을 오래 되새겨 음미하게 하신다.

 

정현종 시인의 <섬>에서처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우리는 섬들에게 그 교훈을 알게 하는 종이다. 종으로 부르심이다. 그리고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발자취를 되새겨 따르게 하신다. 곧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 9:7).”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말씀이 고스란히 노아에게 들려지고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것이다. 먼저 앞서 간, 죽은 자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그렇게 각각의 신을 벗었다. 유추를 하면, 흩어져 떠도는 섬 같은 신발을 앞서 간 이의 아들아이가 정돈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역할은 확연하여진다. 주가 하신 바, 그 걸음을 따르는 것이다. 억지로 소리 내어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슬픔까지도 주 앞에서 덤덤하였던 장례식장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저의 남겨진 사모와 아이는 내게 말 그대로 함의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은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로 인하여 ‘그는’ 우리로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역사하심을 바로 앎으로 허구한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를 맡기신 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저들이 입고 있던 무채색의 옷과 같이 차분하고 조용하여 거리에 들리지 않는, 고요한 장례여서 그 여운이 길게 남았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이 많았고 거리는 한산하였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시고 계신 일이다. 하실 일이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3-4).” 오히려 그 위로가 내게 전하여지는 듯하였다. 우리는 모두 사는 날 동안은 모른다. 마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다음 이야기가 어찌되는지, 결말이 언제 날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직 남은 이야기를 살아봐야 알 것이다. 조심스러운 표현인데, 나는 영정사진 속의 낯익은 저이의 얼굴을 보며 저의 안식이 부럽기도 하였다. 이제 다 마치고 돌아간 저의 영혼은 지금 얼마나 평안할까? 맡기신 생을 다하고 비로소 주의 부르심을 받은 이의 표정이 꼭 그렇듯 말하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십시오.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십시오. 겁내지 마십시오. 굳세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구하실 것입니다.

 

그의 평안한 표정이 마치 장차 있을 우리의 확실한 쉼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1-2).” 마치 다음 이야기가 어찌 될지, 지루하고 답답하고 몸서리쳐하고 있을 때 ‘이 땅의 생이 끝나고 나면 기어이 차지하게 될 즐거움과 영광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미리 들려주며 살짝 책장을 뒤로 넘겨 슬그머니 읽어본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앉아 응대하며 대면하는 사모의 표정에서 그와 같은 소망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봉투에 그 말씀을 적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곧 ‘소망의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길.’ 남겨진 가족들에게 같이 나누었으면 하는 말씀이었는데 도리어 그 말씀이 오늘 아침 내게로 들려지는 것 같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가. 당최 다음 이야기를 알 수 없어 죽고 싶을 정도로 힘에 겨운 이야기 한복판에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10).”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으로 들려지는 일이니 놀랍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모든 게 끝장난 것 같고, 하늘이 두 쪽 나고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때에 들려주시는 말씀이라. 복을 주시며, 그럼에도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산 자로서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는 우리에게 장례식장은 모든 생의 함의가 담겨있는 듯하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2).”

 

우리의 사명은 계속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이를 전하여 알게 하시려고, 곧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4).” 종으로 오셔서 종으로 살다 종으로 죽으신 예수를 생각하라. 종으로 부르시고 종으로 세우셨다가 종으로 부르신 아버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에 더 남은 생이 어떠하든지 우리에게는 두려워할 게 아닌 거였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2-3).” 결국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