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전봉석 2018. 12. 5. 07:13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창세기 23:1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2

 

 

인생이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겪고 살아야 하는, 이야기다. 모든 진리는 그렇게 살아서 살아냄으로 진리인 것이 입증 된다. 곧 우리는 진리를 산다. 사는 동안에 우리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사라가 127년을 살았다. 저가 누린 햇수이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이 서사인 것과 그 이야기 안에는 진리가 스며져 있음을 알려준다. 한 사람이 누린 햇수 안에는 고스란히 진리가 담긴다.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에서 ‘왜 사느냐’의 문제로 나아갔다가 이내 ‘무엇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답을 안겨주는 것이다. 곧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진리가 무엇인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우리 가운데 거하신 진리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다. 살면서 사는 동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살아도 사는 데 얽매이지 않는 삶으로의 인생이라니!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1).”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진리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살아냄으로 기어이 진리가 진리인 것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나아간다. 그때에 우리의 대답은 베드로의 것과 같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막 8:29).” 이를 우리가 말하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이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30).” 이는 진리가 말에 있지 않고 소소한 일상의 반복과 넌더리나는 그 하루하루의 자질구레한 것들 가운데서 빛을 내는 것이다.

 

이어지는 주님의 증언이 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31).” 비로소 죽음을 말씀하시고 부활을 증거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이를 우리의 이해와 상식은 받아들일 수 없어서 항변하고,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32).” 졸지에 그러한 우리의 의문은 사탄의 것이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33).” 여기서도 우리의 사는 일이 결코 사람의 일이 아닌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하는 게 진리다. 사는 게 진리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사는 삶이 살아서 이내 그 햇수를 다함으로 진리를 살아낸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 저들의 나라가 아브라함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창 23:19).” 그리 확정되어진 땅에서 영원히 안식한다. 아이와 함께 여러 번 읽고 그것을 글씨로 적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구구하여 온갖 사연을 안고 살았으나 이내 우리는 확정된 곳에 깃든다. 그처럼 여러 방법을 도모 하고 궁리하고 함께 하였던 생이 끝날 때,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시 60:11).” 결국 우리 스스로 구하였던 구원은 헛된 것임을 상기시킨다. 아이는 확정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다. ‘확실하고 틀림없는 것으로 그 일을 정하는 일.’ 우리 마음을 그리 정하였다는 굳은 의지. 불현듯 내 안에 이는, 그리 여겨지는 마음. 그렇게 확실하고 틀림없는, 진리.

 

나의 설명은 아이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길어졌고, 길어지다 이내 ‘그리 사는 일’로 귀결되었다. 삶은 사는 일이지 아는 일이 아니다. 앎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삶으로 아는 게 진리다. 내가 진리를 산다는 것이 때론 모호하고 혼란스러워도 묵묵히 그냥, 또, 그리 살아드리는 일.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날에서 나는 이와 같이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요란하지 않고, 뭔가 대단한 구호를 생략한 채, 무던히 또 하루를 맞이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날들로써의 하루하루.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욕설로 사용되어 ‘제기랄, 젠장’ 하는 따위의 시궁창 같은 땅에서 이내 우리가 회복하는 진리의 고백,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막 16:16).”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배어나는 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저 툭, 툭, 욕이 튀어나오는 땅에서.

 

이 놀라운 권세를 주셨으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9).” 우리는 저들을 위해 빈다. 기도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아이와 그 부모와 그 가정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초딩 4학년 아이가 잠언을 소리 내어 읽어 그것을 녹음하여 카톡으로 보내왔다. 아내는 그것을 아이에게 숙제로 내주었다. 떠듬떠듬 읽는 아이의 목소리가 우습다.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영혼은 얼마나 불쌍한가!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 135:18).” 누구에겐 우상숭배가 되어 저를 얽매이게 하나 누구에겐 그것이 자유하게 한다. 예수님은 왜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감추게 하셨을까? 영광을 감추심으로 이내 이루어야 하는 목적, 죽으심을 이루기 위한 거였다.

 

죽어져야 비로소 살아나심의 부활이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보이셨다. 설명하여 말로 설득할 수 없는 게, 사는 일이다. 살아서 이내 삶으로 진리가 되어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었다. 주님의 말씀은 간략하게 정리하면 ‘결정은 내가 한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를 살아라.’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나는 요즘 나의 이런저런 사연이 그 구구한 변명과 앓는 소리하는 엄살이 주를 바라는 평형수가 되어준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고작 나의 이 못난 자아가 주께 쓰일 수 있다는 데 놀라워하면서! 주인 부친은 내게 다과를 권하며 자신들이 돌아오는 2월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할 것과 새로 여길 누구에게 세를 줘야 할 것에 대해 말하였다. 결국은 내게 어쨌든 자신들의 소유를 맡기는 소린데, 듣는 중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하나님이 교회를 이뤄 가신다는 게 나의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저 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를 지키는 일. 겨우 ‘이 아이’ 하나로 긴장하고 갈등하면서도 주 앞에 자꾸 아뢰는 일. 고작, 겨우, 참으로 보잘것없는 나의 못난 일상이 고스란히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쓰인다는 사실. 내가 어찌 이루어서 쓸모 있는 그릇이 되는 게 아니라,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그리 필요에 맞게 어르시고 만지시면서 시의적절하게 사용하시는 일에 대하여. 어느 신학자는 ‘희생 없는 삶은 경멸스럽다.’고 했던가?

 

나야말로 희생을 운운할 처지조차 못 되어 주가 그리 사용하시는 데 놀라워할 때가 있다. 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필요로 하고 감사히 여기는 일에 있어서, 나는 우쭐하기보다 면구스러운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보다 더 선호하고 달가워하는 종교문화에서 우리는 이내 ‘보이는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한 게 없는데 그리 하신다. 가다보니 그 길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늘 주저하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이 보잘것없는 하루하루가 기어이 그 햇수를 채우는 동안 진리를 진리로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를 바라며 도우심을 늘 붙들면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창 23:1).” 이어지는 구구한 이야기는 모두 하나다. 그리하여 진리를 삼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다만 오늘 행하는 한 가지 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행하리니’ 진리가 나의 하루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여기가 광야라 해도, 것도 성령의 일이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빈번하게 사탄은 우리 곁에서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기회를 엿본다 해도,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그럼에도 나의 하루는 자유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곧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시 6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