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창세기 33:17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70:4
우여곡절 끝에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고 숙곳에 집을 지었다. 숙곳은 후에 갓 지파의 몫이 된다(수 13:27).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처음 진을 친 곳으로, 비돔 근방 홍해에 인접한 곳이다(출 12:37, 13:20, 민 33:5). 두려움을 안고 에서에게 왔다가 비로소 안도하며 쉼을 취하는 곳이다. 한껏 자신을 낮춰 화해를 이루고 잠시 멈춰 쉬었던 것이다.
모처럼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쉼을 얻었다. 특별히 바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소릴 하는 게 민망하긴 하지만, 일상 가운데 안식은 반드시 그리 취해야 하는 일이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그냥 늘어지는 게 아니라, 사명의 연장이 안식이다.
안식이 없는 삶은 여전히 애굽 땅 종 되었던 삶을 구사하는 꼴이다. 자신의 불안에 매여 늘 바삐 움직이는 삶이고, 여전히 근심을 메고 먹고 사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일이며, 가족의 요구나 희망은 물론 사람들의 시선에 매여 어쩌지 못하고 그리 해야 한다는 당위의 노예로 사는 일이고, 문화에 기대어 유행을 좇고 취하느라 여전히 바쁘고 고단한 삶을 자처하는 일이다. 믿음의 확실한 방점은 그래서 쉼에 있다.
결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런데 그럴 수 있다고 여겨 고집을 부리는 동안에는 쉼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문득 영혼을 점검하고 돌보는 일이 쉼이다.
하나님은 왜 안식을 그처럼 중히 여기셨는지 알겠다. 우리가 쉼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계속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리 볶아대는 매여 있음의 종노릇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비유로 상기시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8).” 결코 우리를 혼자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쉼이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혼자 내려가 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집으로 가려니까 또 서로가 성가실 것 같아서였다. 잠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올라와 잠깐 소파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햇살 고운 날에 나른하니 몸과 영혼은 급할 게 없었다. 서서 읽다 앉아서 읽다 누워서 읽다, 설교 원고를 다시 읽고 ‘기억하라’는 의미를 여러 번 되새겼다.
혼자 있는 시간이 결코 혼자 있는 게 아님을 알게 하신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 들풀을 들어 말씀하신 의도이다. 저는 결코 혼자 외롭게 피어있는 것이 아니다. 햇살과 바람과 이슬이 주의 손길을 찬양하게 한다. 그런즉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일, 혼자 있는 시간이 그 쉼 가운데서 알게 하시는 특별한 사역이란 생각을 하였다. 누구와 통화를 하고 저를 위로 하다 아이의 기도 내용을 떠올렸다. ‘남들에게 물건 취급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쉬는 동안에도 문득 떠오르는 어려움이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다. 이를 서로 나누어지게 하시는 일이 쉼에 포함되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그저 늘어져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쉼이 아니다. 미처 생각을 다하지 못했던 일, 마음을 두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일, 더 깊이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였던 일이 떠오르면 그 짐을 주께서 벗겨주시는 게 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씀이 그대로 일상 가운데 접목되는 순간이다. 한데 조금은 이해가 안 가는 게 무거운 짐 위에 예수의 멍에를 메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이다. 짐 위에 짐일까? 이처럼 말씀은 역설을 덧대어 그 의미를 상기시킨다.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늘어져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는 게 쉼이 아니었다. ‘저 아이’, 그 한 영혼을 두고 미처 주 앞에 아뢰지 못한 일들. 혹은 미루고 외면하였던 ‘저의 영혼의 짐’을 내 짐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주께 지우는 시간이다. 주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그리 더하여지는 어려운 마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알게 되는, 비로소 감사하게 되는 수고의 보람이었다.
그 근거는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게 참 신기한 노릇이라. 생각하고 생각하여 더 힘에 겨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주의 은총을 바라게 됨으로 저의 영혼을 그저 측은히 여기는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얻은 복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짐은 가벼움이라.’ 결국 내려놓음이란, 자기 십자가를 마땅히 여기는 일이었고, 그것은 거기 그 자리에 두시는 이의 온전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일이었다. 마치 들풀처럼, 저 백합화가 그저 아름답게 제 자리를 지키는 일처럼.
두신 이의 가장 큰 기쁨은 그리 두신 데서 온전하여지는 일이었다. 그게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뭔가 개선이 필요할 것 같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과 근심과 남의 시선이나 자신의 당위로부터 놓여나는 시간이 쉼이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곱에게 있어 숙곳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니겠나? 생각하였다.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는 길에 떼를 나누었다 또 혼자서만 떨어졌다가 온갖 궁리를 다하였다가 모든 것에서부터 놓여나는 곳이 숙곳이 아니었겠나?
아이의 기도가 내심 마음에 걸려 안쓰럽고 측은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분주함에서 놓여나 가만히 그 속을 살피고 주 앞에 되새기며 긍휼하심에 드는 하루였다. 그러니 그것까지도,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시 70:2).” 마치 엄마 품에 안겨 어떤 서러움을 토로하며 비로소 안도하는 아이처럼.
왜 예수님은 우리 짐에 겨워 무거운데 그 위에 자기 짐을 지고 멍에까지 얹어 쉼을 얻으라고 하시는 것이었을까? 문득 바울의 기도가 그런 의미에서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괴로움을 기뻐한다니! 그것을 오히려 내 육체에 채운다니!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쉼이란, 그 안식이란 이와 같은 게 아닐까?
되새겨 아이의 기도를 아파하며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시 70:3).” 하고 주께 속삭이듯 아뢸 수 있는, 여유. 그래서 맛볼 수 있는 기쁨,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 슬픈데 슬퍼서 주를 바라며 주께 고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까지도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한참 즐겨 읽던 C. S. 루이스의 글 가운데,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지 고민하는 일을 집어치우지 않는 이상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늘 고단하고 힘든 까닭의 대부분은 내가 어떻게 보일까? 아빠로서, 목사로서, 나름 괜찮은 사람으로 비춰질까? 하는 식의 고민들로 피곤하였다. 아이의 그런저런 일을 어쩌지? 하고 고민하였던 것들도 실은 내가 어떻게 좀 해봐야 한다는, 그래서 좋은 인상을 얻고자 하는 데서 오는 고단함이었다. 저는 말했다. ‘자신을 버리라. 그러면 참다운 자아를 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딱 필요한 자리에 나를 세우시고 여기 두셨다는 확신.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들의 번성과 평안을 구하는 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그게 비록 바벨론 한복판이라 해도 기꺼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나는 창고에 들여놓았던 자전거를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기름칠을 하였다. 휘적휘적 식물에 물을 주고 그 잎사귀를 닦았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였다. 책상위에 얼룩진 아이들의 낙서를 지우고 물티슈로 훔쳤다. 안식이란 이처럼 평소에 미루고 못했던, 마음씀을 거두는 자리이다. 형 에서에게 갖고 있던 경계심을 풀고 그제야 안도하며 집을 짓고 울타리를 세우는, 숙곳의 한 날이었다. 아내와 멀리 마트에 들렀다가 저녁을 먹고, 야근하고 돌아오는 딸애를 마중하여 돌아오는 일. 그렇게 한 주간이 마무리 되며, 쉼이란 하나님이 그리하신 평안이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창 33:17).” 곧 우리의 매순간 숙곳 같은, 안식 같은 쉼으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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