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결국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루시고 이끄시고 다스리신다. 일이 벌어져 수습도 못하고 있을 때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올라가라, 거주하라, 쌓으라.’ 지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예배 전, 지난 주일에 왔던 고3 아이가 전화를 하였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나에게까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녀석은 받지 마세요, 하고 그 애의 이런저런 상황을 다시 상기시켰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서로를 이해하지만 서로가 주체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간 벌어진 ‘거리두기’에 대해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왔다 가면 그만인 게 아니라 또 서로가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문제였으니.
늘 보면 나는 그저 속수무책이다. 기껏 벌여놓은 일도 주체하지 못해 어려워할 따름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고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어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나는 말씀 앞에서 항상 송구하고 민망해할 따름이다.
날씨 탓인지 허리가 아프고 마음이 어려웠다. 예배를 마치고 아이가 돌아간 후 나는 잠깐 누워 허리를 지졌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증거한 말씀이 도로 내게 울림이 컸다. 무엇에도 연연해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서로 거리를 두게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저들의 딱한 사정과 감당이 안 되는 이들의 무모함이 속상했다. 고3 아이의 전화를 무시한 게 마음에 걸렸다. 어떤 대화도 어려운 처지에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방기하고 회피한 게 아닐까, 마음이 아팠다.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진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싶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속상함. 그와 같은 감정이입이 때론 나를 주 앞에 더욱 간절하게도 하고 회의와 갈등에 시달리게도 한다. 나라도 좀 의연하고 건강하였으면 괜찮았을까? 그러니 그 부모 속은 또 어떻고? 비록 표현이 어눌하여서 그렇지 말 못하는 저들 심정은 또 어떻겠나, 하는 심정에 공연히 혼자 어려웠다.
그럴 때 들려주시는 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는 마땅한 울림이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여기서 이것이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해보려는 가장 말초적인 나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 대체물이 돈이다.
하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모든 악의 뿌리가 그리하여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이다. 탐내다는 것은 내가 몹시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 되는 타동사로 이를 이끄는 가장 대표적인 매개가 돈이다. 그것이면 될 것 같은 수단이다. 실제 그리 통용되는 가치다. 그것으로 이루고 쌓아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를 피하라는 게 성경의 방침이다. 모든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하신다. 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영생을 취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나를 여기에 두셨다.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증언하게 하심이다. 말씀을 되새기며 내 안에 가해지는 자책을 물리친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마음에서 놓여난다.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늘 송구하고 민망하지만 주께서 또 해결하여 주시기를. 저 아이의 마음도 위로하시고 그 가족의 어떤 서러움도 다스려주시기를.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 휘둘려 혼자 우울하고 아팠다. 그러면 나라도 외면하지 말고 받아주어야 하는데, 나는 사실 겁이 났던 것이다. 정신분열증이 있고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아이라는 말에 고개를 돌린 게 된다. 그렇게 마음이 어려웠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할 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예배를 마치고 아내와 딸애가 잠시 볼일을 보러간 사이 소파에 누워 허리를 지지다가 곤히 잠이 들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127:2).” 말씀의 의미가 새롭다. 울렁거릴 정도로 마음이 어려웠던 게 더는 주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주 앞에 나 몰라라 맡겨버렸다. 내려놓아버렸다. 무책임하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위인이라, 다만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렸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27:7).” 은혜란 그런 게 아닐까? 새 힘을 얻어 뭔가 또 새로운 일을 모사하고 궁리하여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더욱 주의 은총을 구하고 바라는 것으로,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25:6).” 주께 아뢰고 또 고하는 것,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59:17).”
속상하여서 그 감정에 휘둘려 가는 게 옳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허리가 아파서 혼자 남아 주의 성전에 있을 때, 나를 곤히 잠들게 하심으로 삼십여 분 나는 정말 거짓말처럼 깊이 안식하였다. 어쩌면 이러한 상한 마음이 주께 나오는 계기가 되었고 주를 바랄 수밖에 없는 원천을 이루었다. 내 처지와 마음과 어떤 기억들이 중첩되어 자꾸만 감정으로 빠져드는 내게 주님은 쉼을 더하신 것이다.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하여.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말씀 앞에 앉아 행여 또 이것이 나로 하여금 안이하고 나태하게 구는 핑계가 되지 않게 하시기를. 어떤 서러움과 또 마음의 어려움을 안고 주 앞에 서는 일, 그것이 내게 두시는 ‘자기 십자가’이겠구나. 이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데는 또 다 그만한 이유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내가 이처럼 마음이 어려웠겠나?
아내와 딸애마저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는가, 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던 것이니. 각자 지고 가는 무게가 서로 다른 것 같으나 그 몫이 또한 그 믿음의 분량에 따른 것이라. 다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심이 은총이었다. 주의 뜰에 살게 하심이 귀하고 복되었다. 하여 주의 집 곧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게 두신 실상이라. 이 정도밖에 안 되고 고작 이 모양이 전부인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해도 곧 내게 두신 주의 집, 그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일이었다.
이에 오늘 아침, 나의 반응을 야곱의 이행으로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 35:2).” 저가 거처한 ‘숙곳’에서 만일 ‘디나의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이처럼 순복할 수 있었겠나?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2).”
내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일. 어쩌면 날마다 드려져야 할 우리의 마땅한 바 그 믿음의 분량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 주가 이루신다. 홀로 기이한 일을 행하심이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8-1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0) | 2018.12.19 |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0) | 2018.12.18 |
내가 주께 피하오니 (0) | 2018.12.16 |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0) | 2018.12.15 |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0) | 2018.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