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전봉석 2018. 12. 23. 07:0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창세기 41:38-39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편 78:72

 

 

일련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이루시고 다지시고 기다리시며 조성하신다는 것이다. 때론 오래고 더뎌서 더는 희망이 없겠다 싶어질 때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잃어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는 동안 요셉은 옥에 갇혀 주어진 일상을 살았을 것이고 어느 날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또한 적합하게 되었다. 우리의 몫은 ‘그러는 동안’의 충실함이 아닐까? 이를 바로의 입으로 들어보면.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 곧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성령이 우리를 주도하신다. 나서서 어찌 이루려 한 것의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하신 일의 결과다.

 

가령, 아이가 일찍 왔다. 취업이 되어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좋은가 싱글벙글이었다. 먼저 일기를 쓰고 성경공부를 하였다. 전에 아이가 기도할 때, 어디서든 물건 취급을 받지 않게 해달라는 아룀이 내내 남았었다. 이번에는 일기에서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원한다는 표현에서 울컥하였다. 이제 법적으로도 저를 ‘정신지체장애 3급’ 판명을 하였으나 나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본다.

 

은연중에 앞뒤 맥락 없이 쏟아지는 표현이지만 그 가운데서 이처럼 아름다운 고백이 또 있을까? 우리의 일상이란 그런 게 아닐까? 어디서도 물건 취급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아이의 기도가 나아가 하루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해달라니! 같이 점심을 먹고 당구를 치고 오후께 아이가 돌아가고도 내내 그 여운이 남아 감동적이었다. 이 모든 걸 지으신 이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이와 같은 마음을 주시는 이가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15:8-9).”

 

기특하고 또 부끄럽기도 하여 오히려 내가 더 감사를 배우는 것이다. 이 놀라운 증거,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를 실감하고 목격하고 몸으로 직접 살아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이 아닐까? 바로가 이를 보고 깨달았다. 안 믿는 자들의 수장의 눈에도 이는 감출 수 없는 빛이었다. 주가 더하시는 은총과 인도하심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일에 사뭇 집중하게 하시는 것 같다. 나에게 저 아이는 그런 역할을 하였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하나님이 지도하시고 기르시고 완전함으로 함께 하실 것에 대하여. 이는 단순히 ‘어쩌다 어른’, ‘어쩌다 그리 된 일’이 아니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그래서 더욱 주께 집중하고 아이를 돌보며 허튼소리이나 맥락이 맞지 않는 장황한 설명에도 귀를 기울이게 하시는 거였다. 주가 돌보신다. 어찌 함께 하시고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게 하신다. 일은 어떠니? 사람들은 잘해주니? 힘들지 않니? 하는 나의 단세포적인 질문들은 고스란히 우문이 되었다. 무얼 한들 놓여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주께서 이루시고 다스리실 것임을. 다만 이를 목격하고 묵상하며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고.

 

아이가 돌아가고 긴 여운으로 남는 마음이었다. 아내가 나와서 같이 산책을 하고 저녁께는 부모님이 오셔서 같이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을 때도, 우리에게 더하신 날들의 의미와 목적과 기준을 묵상하였다. 주가 이루시는 놀라운 날들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의 삶이란 그리 단순하면서도 고상하고, 별 볼일 없는 것 같으나 엄청난 은혜의 날들인 것이었으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우리의 날들에 대한 명료한 진술이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3).” 오직 주만 바라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로,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7).” 살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으로 승부를 볼 것인가? 나의 수고도 우리의 질실함과 성실함으로 이루어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아이의 고백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 우리는 의의 무기로 삼고 사는 일이다. 이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8-9).”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여전히 감옥에 갇혀 남은 생을 그리 속절없이 보낼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요셉을 그리 불러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곧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10).” 이로써 우리의 일상이 고스란히 하나님의 영광이 되시기를 바라는 아이의 마음이 수천 년 전 요셉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느닷없는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창 41:9).” 이를 통해 잊힌 것을 기억해내는 사람과 여기까지 오면서 비로소 요셉의 고백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곧 누가 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고 일하고 계시며 일하시는 것임을,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이에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시 78: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