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창세기 43:26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시편 80:1
말씀은 단지 글로만 읽힘으로 그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그 말씀에는 ‘사전적인 의미’와 ‘지시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가 모두 포함되는 은유다. 은유는 직접적인 그 말이기도 하면서 다른 말이기도 하다. 표면적인 언어이면서 내재적인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은 실재의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이다.
언젠가 요셉이 꿈을 꾸었다. 그리고 오늘은 저들이 요셉에게 절한다. 그것으로 미워하고 시기하여 끝내 죽이려하다 노예로 팔았던 동생 요셉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생에 대하여 무슨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연이라 칭하거나 좀 더 고상하게 숙명이라 일컫기도 한다. 때론 말씀의 진행 과정이 엄청나다. 모든 인생은 드라마틱하여 저마다의 우여곡절 속에 하나님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창 43:26).” 머리에 그림을 그리듯 그 광경을 떠올려본다. 얼마나 두렵고 절박했을까? 서로가 다른 격정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27).” 그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28).” 두려움이 생생하다.
요셉이 베냐민을 본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29).” 의연할 수가 없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30).” 울컥하고 복받쳐 오는 감정으로 우린 종종 서로를 또 누구를 그리워한다. 마침 오늘 시편의 첫 소절이 일품이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시 80:1).”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의 긍휼하심에 대하여,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나를 인도하사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심으로 오늘의 내가 가능하였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가보다. 그래서 아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저녁 늦은 것으로 영화표를 예매하였다가 결국 취소하였다. 기껏 갔다가 예매를 취소하고 돌아왔다. 몸은 정직하여서(!) 여느 날과 다른 것에 그처럼 어려워하였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다들 왁자하니 노는 분위기인데 나는 정해진 시간에 잠이 들었다. 유난을 떠는 게 볼썽사납기도 하지만 너무 침체돼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어릴 적에 성탄절을 준비하며 며칠씩 밤새고 교회에 모여 성극을 준비하고 칸타타를 연습하던 기억이 그리움처럼 아련하였다. 아이들에게 오래니까 우리 교회는 재미가 없어서 싫단다. 결국 저기 앞에 큰 교회로 간다고 하였다. 잘했다고 했다. 재미없다는 말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유난을 떨 듯 성극 할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꾸미고 서로가 낄낄 깔깔 즐거움에 까르르 넘어가던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이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지도 위에 표시된 경도와 위도로 그려진 길을 보면서 가는 것은 아닐까? 그 절경과 이루 말할 수 없는 풍경과 즐거움을 보지 못하고 지도에 얼굴을 묻고 앞에서 오른 쪽으로, 왼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지도책을 뒤적거리며 그러는 동안 정작 놓치고 있는 저 아름다움을 못 보고, 못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마처럼 이내 부활의 주님이 오셨을 땐 정작 그 자리에 없었던 이여서,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엔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주님은 저를 찾아오셨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그러할 때 비로소 저의 고백은 달라지는 것이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나는 아이들이 우리 교회에 오는 것이 재미없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누군 큰 교회로 갔고 누군 그것조차 귀찮아서 안 갔다.
아이들이라 그런가? 어쩌면 우린 지도로만 보면서 재미를 운운하려니 가는 길이 내내 직선과 곡선일 뿐이라. 산이 있고 강도 있고, 새가 날고 구름이 지나가고, 여러 도시가 펼쳐지며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넘치기도 하는데, 지도책으로는 도대체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이었으니. 내가 저 아이였다가 그마저 밋밋하여 재미가 없는 지도책 위로 데구루루 굴러 떨어진 기분이었다.
설교 원고를 뒤적거리고 아이에게 오늘은 어땠는지, 공장은 괜찮은지 안부를 묻고. 그저 심심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 내게 주님은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지도책도 아니고 들썩거리며 재미를 추구하는 축제의 골목도 아니라, 일상 가운데 딛고 따라가는 길이 곧 예수시었다. 그리고 일러 더 큰 일을 제시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우리의 일상의 발을 씻기시고 다른 때와 달리 긴 설교를 이어가시더니 기도로 마무리하시는 주님의 행적을 좇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핵심은 이 한 구절이었다.
아버지께로 가심은 성령으로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큰 일,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그 큰 일은 그 길을 따라가는 것. ‘나는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을 열다섯 번 반복하시고, ‘내가 성령을 보낼 것이다.’는 말씀을 무려 스물네 번이나 다양하게 언급하시면서(요 13:1-16:33), 주가 떠나심은 결코 우리를 버려둠이 아닌 것을 강조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나의 성탄절 이브는 외롭고 심심하였고, 어눌하고 어려웠으며, 밍밍하여 ‘재미없는’ 날이었지만 그래서 말씀을 준비하고 누구를 생각하고 성전을 서성거리며 주를 바라였다. 결국 날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이 계셨으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17:22-23).”
나로 주와 하나 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오늘 성탄절 아침, 요셉의 지난했던 날들을 생각하고 격정의 순간에 초대되어 그 자리에 배석하였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창 43:27).”
그리고 이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28).” 그리하여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0) | 2018.12.27 |
---|---|
내 도를 따르라 (0) | 2018.12.26 |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0) | 2018.12.24 |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0) | 2018.12.23 |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0) | 2018.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