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창세기 47:8-10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저의 ‘험악한 세월’이 파란만장하긴 하였다. 돌아보면 각기 그 인생을 들고 주 앞에 서는 게 아닐까? 이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31).” 주를 바라며 그 의지하는 세월이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지나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어떠했든 모든 게 지나가는 것이어서 부득불 붙든 것을 놓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보다 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라! 그 값어치를 바로 알기까지 참 누구나 ‘험악한 세월’을 살아내야 하는가보다. 스스로 애쓴 삶이라 여기는 것은 돌아보면 그저 허망한 것들뿐이어서, 이내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께 경배’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문득 생각난다. 바울이 왜 감옥에 갇힌 자신을 자부하였던가?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저의 마음에는 온통 그리스도뿐이었다. 사나 죽으나, 갇힌 자로나 풀려난 자로나, 저는 저의 삶이 그저 주의 남은 고난을 지는 것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기를 바라였던 것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2).” 하는 고백이 더욱 귀히 들리는 듯하다. 곧 바울의 표현처럼 자신의 육체로 채우고 살았던 야곱의 교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어떠한가? 오늘 말씀은 이를 돌아보게 하시는 것 같다. 저는 의탁한 곳의 바로를 축복한다. 바로가 묻는다. “네 나이가 얼마냐?” 돌아보니 어느덧 130년이라. 조상들의 세월로 비춰볼 때,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저의 짧은 진술이 나그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10).” 우리의 역할과 사명을 일깨우시는 것 같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저의 험악했던 세월의 대부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앞서 행하였던 죽 한 그릇으로 산 장자권에서부터,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자로 떠돌던 세월이며, 자신이 원하는 여자 라헬을 얻기 위해 벌였던 7년과 7년의 시간하며, 그의 애착과 편애가 빚어낸 자식들의 험악했던 세월까지. 그때마다 하나님은 긍휼하시었다.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주의 은총이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막내 동생이 새로 창립하는 교회에서 기부금영수증 서류가 없다고 해서 이를 보내주었다. 그러다 이메일 주소록에서 한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찾았다. 종종 마음에 남은, 97학번으로 신학교 신학부를 편입하였을 때 여러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다. 졸업하고 한동안 연락이 닿았다가 저가 결혼을 하고, 어디로 선교를 떠나고, 아이 셋을 낳고 하는 소식을 종종 듣다 끊겼다.
어찌 지내는지, 짤막하게 안부를 묻는 메일을 부쳤다. 내 기억으로 저 친구야말로 어린나이에 ‘험악한 세월’을 알았다. 이혼한 가정에서 남동생과 같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였었고, 언니가 결혼을 했었던가? 가난이 몸에 밴 어린 시절이었으나 얼마나 씩씩하고 명랑하던지. 나는 그때 억지로 끌려간 듯 시늉만 내면서 신학을 다니고 있을 때 나이 들어 시큰둥한 나를 ‘둘째 형님’으로 호칭하며 그리 살갑게 챙겨주었던 사람이다. 알고 보니 나보다 한 살 많은 사람을 첫째 형님이라 불렀다.
그렇듯 저마다의 나그네 인생이 험악할 따름이라. 그래도 늘 잘 되길 바랐고 위해 기도하였던 게 생각난다. 어느 감리교회 목사 가정에 시집가서 삼 대째 목회를 잇는 자의 사모가 되어 아이 셋을 낳고 다복하게 산다는 소식까지 들었던 것 같다.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아린 사람이었다. 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결국에는 나 역시 돌아와 신대원을 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은근히 저이에게 예전의 내가 아닌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또 10년.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몬 1:11).”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인 것을 하나님은 일일이 이를 선으로 바꾸셨다. 새삼 오네시모에게 한참 머물렀던 하루다. 저는 종으로 노예로 살았고, 그러느라 그리스도인인 주인 집 빌레몬과의 교제에서 실패했다. 그 안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했을까? 결국 도망쳐 로마로 숨어든 것인데, 어떻게 저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날 수 있었을까? 십중팔구 저도 옥에 갇힌 신세가 된 게 아니겠나?
기구하고 험악하다. 한심하고 답답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참으로 세밀하시다. 옥에 갇힌 바울을 시중들게 하셨으니 그러는 동안 저 안에 응어리졌던 원망도 미움도 모두 녹여버리신 게 아닌가?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야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그게 내 이야기 같고, 오네시모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다보니 그게 또 내 이야기가 아닌가.
차마 내 입으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세월이었다. 그런데도 그때마다 이를 선으로 바꾸시던 하나님의 손길이 생생하다. 느닷없는 도움의 손길은 물론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닌데 저를 보내 나를 설득하게 하시고 신학을 하게 하시더니 학비까지 저에게 지우셨던 것인데, 그때마다 나는 번번이 틀어지고 또 외면하여 다른 길로 달아나기 일쑤였으니. 새삼 누구 생각을 하다 나의 ‘험악한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이제 나의 침상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뿐이다.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나의 포도원지기이시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그때마다 나를 두둔하며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고 나를 위해 ‘두루 파고 거름을 주’시었다. 죽은 것처럼 살았고 죽지 못해 살았던 날들에 대하여, 그러느라 억지스럽게 사랑을 갈구하고 사람에게 기웃거리며 살았던 세월에 대하여. 그럼에도 그때마다 나의 허물과 죄악을 선으로 바꾸신 주님.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안위하심이라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그때 죽어 마땅했을 죄인을. 내가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쓸모없고 볼품없이 값어치 없는 사람인 걸 내가 잘 아는데, 어찌 나를 그처럼 귀히 여기시며 끝내 놓지 않으셨는지.
늙은 야곱의 회환이 새삼스럽다. 그러했음에도 바로를 축복하는 것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10).” 저를 또한 당당히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었다. 그저 우리는 욥의 친구 빌닷의 표현처럼,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욥 8:9).” 보잘것없고 한줌 값어치도 안 되는 것인데,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이제는 곧 주 앞에 경배뿐이다. 은혜 아니면 돌아볼 것도 없는 인생을 두고,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창 47:31).” 나의 나 됨이 주의 은혜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나는 경배한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 841, 3-4).”
그리하여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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