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하나님이라

전봉석 2018. 12. 28. 07: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세기 46:3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편 83:1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아이를 보면 참 나 같다. 뺀질거리고 깐죽거리는 녀석이나, 스스로 자기 감정에 못 이겨 눈물을 질질 짜는 녀석이나, 능란하게 변명하며 남 탓을 하고 이를 핑계 삼는 녀석이나. 결국은 또 혼자 토라져서 입을 삐쭉거리며 금세 눈물을 흘리던 녀석이 슬그머니 연하장을 내게 내밀었다. 학교에서 만든 것이라는데, 모처럼 받아보는 실제 손 글씨의 엽서였다.

 

아이들 원고를 첨삭하고 돌려주면서 잠깐씩 곁에 세워 당부하였다. 꼭꼭 소리 내어 잠언을 천천히 읽으라고 하였고, 울컥하고 감정이 일어도 혼자 토라져서 심통 부리지 말라고 하였고, 너무 예의 바르게 잘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거짓말은 습관이고 남을 탓하는 것은 자칫 고착되어 성격이 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중등부 여자 아이 두 명에게는 컵라면을 끓여주며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위하여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이란 티도 안 나는 일이지만, 은연중에 서로가 안다. 말씀으로 다가가는 일에 있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는 게 아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문학적인 또는 감성적인 접근으로는 돼도 않는 일이었다. 우리에겐 주의 마음이 필요하였다. 아내와 둘이 예배를 드리면서 항상 바라고 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란 우리 마음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을 잘 안다. 정말 싫증나는 일이다. 진저리나는 아이들 엄마와 징글징글한 아이들의 되바라진 모습을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당장 옳은 소리로 아이의 숨통을 끊어놓을 듯 야단을 쳐서 혼쭐을 내어 쫓아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려던 걸 꾹 눌러 참는 것은 이상하게 자꾸 내가 보인다. 저 아이에게 내가 있다. 나도 그랬고, 더했고, 끔찍했다. 그렇듯 누군가 주의 마음으로 나를 위하고 대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내가 존재하기는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 주의 마음은 아는 게 아니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그게 어디 또 아이들이니까 그렇겠나? 모처럼 오전에 옆 사무실 노인이 건너와 너스레를 떨며 차 한 잔을 나누었다. 여름 내내 우울증에 시달려 식음을 전폐하던 마나님이 요즘은 또 먹어라먹어라 하며 주민 자체 활동에서 총무를 맞네, 같이 술을 한 잔씩 하며 활기차게 사네, 인생은 그런 것이라며 별 거 있겠냐는 둥. 뭐라 한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양반이다. 그러다 매일 오던 아이가 취업이 되었다고 하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 목사님이 빌고 기도하는데 그 은공이지 않겠냐는 거였다. 은공이란 표현이 낯설었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것을 저는 비록 교회를 등지고 살면서도 아는 것인가. 여기서 나의 역할은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일이었다. 우리는 다만 한마음으로 한 뜻을 가지는 일,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6).” 그리 의도하여 강요하지 않더라도 저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첫 월급을 탔다며 감사헌금으로 5만원을 공손히 내어놓던 이가 아니던가.

 

그의 안에 종교심은 있으나 이를 주께로 향하여 바라고 온전히 구할 줄을 모르니, 억척스럽게 살아온 70평생의 자기 신념이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있어서이었다. 우리의 어떤 자격지심이 그와 같은 괴물을 자기중심에 모시고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가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하는 한 가지 일이 있었으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늘 구석진 방에 들어앉아 오는 아이들을 건사하고 저 혼자 씨름하듯 책 속에 묻혀 사는 모습이 저에게는 때로 경이롭기도 한가보다. 같이 어디 좋은 데 가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둥, 이렇듯 건너와 말동무를 하는 게 큰 즐거움이라는 둥. 나는 저의 말을 반은 너스레를 듣고 말지만 그 속에 오히려 내가 더욱 취해야 할 바른 자세와 도리가 숨어 있는 듯하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우리 마음에 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내색을 않는데도 저들에게 비쳐지는 것이다. 나는 저에게 ‘설득력 있는 지혜자의 말로’ 저의 생각을 돌이키고 주를 설명하여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곧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저들을 마주하고 대하는 일이란 마치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과 같다. 주님과 변화산에 그대로 머물며 그저 황홀경에 젖어 살고만 싶은데, 이내 주님은 그 산을 내려가자고 하신다. 와글거리는 시장어귀로, 신음하고 씨름하는 악다구니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으시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게 하신다. 단지 말로써가 아니라 삶으로 저들 가운데서 성령의 나타나심의 능력으로 그 자리를 맡기시는 것이었다. 나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8-19).” 우리가 할 일은 엄연한 것이다. 단지 아이의 말에 위로 격려로 응원하고 토닥거려 공부 잘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모자라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보내시고 붙이시는 게 아닐까? 이제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연이 축소된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얼굴인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더욱 주의 사랑을 간구한다. 내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어서이다.

 

요즘은 매일 저녁께 아이가 퇴근 때면 카톡을 하거나 잠깐씩 통화를 하는 게 일이 되었다. 오늘은 어땠는지, 일은 힘들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잘해주는지. 그렇듯 나의 물음은 일차원적인데 아이의 대답은 언제나 삼차원적이다. 은혜가 충만했어요. 다들 평안하세요. 그래서 잘해주시고 항상 즐거워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열심히 일했어요. 뜬금없고 맥락도 없는 아이의 대답은 늘 나를 바로 세우는 것 같다.


이모님들이나 공장장 또는 사장님이 잘해주시냐고! 하고 나의 우문이 이어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죠! 아이의 현답이 곧 주의 음성으로 들린다. 내가 저 아이를 챙기는 것 같지만 저 아이가 항상 나의 영혼을 돌보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저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래서 ‘목사님의 은덕으로’ 맡은 일을 다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아이들이 내 스승이었다. 나의 숨은 아이를 드러내어 묵은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던 수치와 죄책들을 직면하게 하면서 더더욱 주의 은혜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지혜자들이었다.

 

결국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어떤 마음이 나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할지를 알게 하신다. 아이들이 나를 양육하는 목회자들이었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왜 참아야 하고 또 인내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의 공명심이나 사명감으로써가 아니었다.

 

감사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식상하지만 아이들이 곧 스승이었다. 그때마다 배우는 게 크다.

 

오늘 말씀은 이에 확신을 더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46:3).” 하나님이 두신 날이다. 일이다. 저런 아이고, 저런 상황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일갈하신다. 나는 하나님이라! 세상이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 그리고는 빌라도처럼 일러주는 말에 등 돌리고 딴 소릴 한다 해도.

 

가끔은 노인장의 두서없는 말이 나름은 오랜 경륜과 체험으로 일가를 이뤄 자수성가한 이의 고집불통 자기 말에 겨운 것으로 때론 짜증나고 진저리 날 때도 있지만, 그게 또 저의 자라지 못한 저의 영혼의 응석이거나 칭얼거림이었으니, 묵묵히 들으며 주를 바라고 그 이름을 대신 불러 아뢰는 일이 내 일이었다. 조금은 지겨워하며 하루를 정리하다가도 흔히 우리가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아이’로 여기는 아이의 입을 통해 들려주시는 찬양과 경배 앞에 고배 숙이게 하신다. 안 힘들어? 은혜롭죠. 다들 잘 해줘? 하나님이 함께 하시잖아요!


나는 이보다 더 큰 신앙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 83:1).” 저 아이를 통해 주가 이루시는 놀라운 주의 역사를 기대하고 설레어,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이는 곧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