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출애굽기 5:17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편 92:12-13
서로의 관점이 다르고 각자의 주관이 다른 데 대하여 나는 이제 두려움마저 든다. 같은 사안을 전혀 다르게 보고 앞뒤 분간 없이 자신의 논리로 점철시키며 이에 응하지 않을 때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 묻는 시대에 그래서 나는 지혜자의 교훈이 깊게 다가온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세상은 온통 바로 같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출 5:17).” 저에게 무슨 말을 한들, 기어이 아홉 가지의 재앙이 내리고 열 번째 자식을 잃기까지도 그 뜻을 굽히지 못하는 게 ‘우상’이다. 그래서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우상이란 하나님이 제거된 자기 생각의 온상이다.
죄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모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관념화시키고 추상과 느낌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런 이의 대답으로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이 있을까?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들 눈에는 하다못해 뭐라도 하지 않는 것이어서 ‘여화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 것이다. 종종 친구와 통화할 때, 또 나의 선생이 주로 하는 말이 그러하다. 나 역시 그렇듯 누구를 겨누어 비난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상을 멀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다 늦은 시각, 뜬금없는 아이의 문자. 목사님은 나의 최고예요! 할 때의 머쓱함. 낮에 아이와 시편 66편을 읽다가 '이게 너로구나!' 하고 말해주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1-2).” 나는 자꾸 좀 어떠니? 하고 물으면, 하나님께 감사해요! 하고 아이가 대답한다. 누가 눈치 주거나 야단치는 사람은 없어? 하고 물으면 다들 신경 써주세요! 하고. 토요일까지 일하느라 힘들겠다!? 하면, 힘들긴 한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야죠! 한다.
나는 이제 아이의 이와 같은 대답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낸다는 게 그런 게 아닐까? 더욱이 토요일인데도 오전 여덟 시까지 출근을 해서 점심시간도 없이 오후 한 시까지 근무를 하고, 서둘러 성경공부를 달려온 아이와 함께 읽은 말씀이 그 자체로 찬양이 된 것이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란 힘들고 어려워도 불평과 불만이 앞서지 않게 하는 것으로, 감사와 은혜와 영광을 그의 이름으로 돌리는 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10-12).” 이내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으로 들이신다. 나는 여태 이 아이처럼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았던가?
다들 공치사는 기본이고 누구 탓, 무슨 염려, 어떤 불만, 그 막연한 하소연이 입에 달려 있기 마련인데, 아이의 동문서답 같은 대답에서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는 주의 손길을 느끼었다. 그리하여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92:12-13).” 하는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과 그 찬양이 맞춤하니 연결된다.
나만 그런가? 나는 나이가 들수록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간다. 몸의 쇠약함은 물론이거니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젊어서는 미처 보지 못하였던 견고한 벽을 여실히 느낀다. 두드려도 들리지 않고 서로가 타고 넘을 수도 없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정치는 물론 친구나 이웃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완고한 것이어서. 그래서 노인의 시선은 초점을 잃은 듯 관조적인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곤 하던 것이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벽을 느끼면 느낄수록 나는 하나님과 나의 친밀함을 더욱 간절히 바라게 된다. 다른 데 의지할 게 없고 누구로 희망을 삼을 게 없다. 세상을 사랑하면 그 속에 하나님을 모실 자리는 없다. 이 단순명료한 진리 앞에 두려움마저 든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그러면서도 주를 바라고 구한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 뿐이다.
누구보다 나 역시 그런데 아이의 엉뚱하리만치 적당한 대답이 그런 나를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안에 주를 공경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제는 간구할 줄 안다는 것,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5).” 오늘도 기도하였어요! 하고 아이가 말하면 그날은 어떤, 힘들었던 일이 있었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16).” 점심도 못 먹고 서둘러 달려온 아이가 기특하여 뭐라도 더 주고 싶어서 같이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한 뒤, 얼른 내려가 ‘소머리 곰탕’을 사 먹였다. 때론 이처럼 아이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측은지심은 아니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서로의 영혼이 즐거워하는 것이었으니, 아이의 횡설수설 엉뚱한 대답 가운데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본다.
토요일 오후, 해가 지기 전에 보드도 타야하고 엄마와 겨울 운동화도 사러가야 해서, 나름 그 바쁜 일정에도 먼저 여기까지 왔다가 그리 움직이는 아이의 태도가 복된 것이다. 그 삶이 곧 경배가 아니겠나?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소위 영혼이 맑은 사람이란 말을 나는 아이에게서 배우는 것 같다. 시편 66편을 같이 읽는데 그 첫 구절이 아이의 표현에서, 나의 삶에서 그대로 그려지고 이행돼야 하는 게 아니겠나?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시 66:1).” 그러는 나는 정말 그리 행하고 있었던가?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과연 다른 그 무엇보다 바라고 귀히 여기는 게 맞는다면 아이의 대답처럼, 힘들죠! 그렇지만 감사해요. 하루 종일 그 시간이 은혜예요! 하는 고백이 과연 내것도 그러한지!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 그러할 때 이처럼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입에서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 입의 말이 결코 되돌아오지 않게 하실 것을. 주께 무릎 꿇고 모든 혀가 맹세하게 하실 것을. 감사와 경배로 그 삶이 온통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채워지기까지. 누구에게 뭐라 할 거 없다.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에 대하여는,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출 5:17).” 더는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세상에서 저 아이가 나로 하여금 주를 찬송하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나에게 느껴지는 일이 저의 엄마에게도 그 안 믿는 조부조모에게도 나타날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실 것을.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10).”
우리 안에 서로를 알아보는 어떤 주파수가 있는 게 분명하다.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란 막연하고 공연한 소리가 아니다. 실제의 전율이고 감동이고 감사이며 소통이다. 고로 우리는,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시 92:12-13).” 이와 같은 말씀에 ‘아멘’할 수 있는 것이다.
곧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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