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전봉석 2019. 1. 4. 07:28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4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90:2

 

 

모든 게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말씀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신나고 감사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전 9:1).” 같은 말씀인데 전에는 속박처럼 여겨졌으나 이제는 안심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 전혀 다른 세계다.

 

가시떨기에 불이 붙은 것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내가 이고 지고 그 무게에 눌려 힘겨웠던 삶이 전혀 다른 게 되는 것이다. 곧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신 말씀의 의미을 알겠다. 곧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29).”

 

쉼! 쉼 같은 일. 종종 초딩 아이들이 뭘 안다고 말씀 한 구절을 옮겨 적고 그 의미를 살펴가며 자기들의 이야기로 쓰는 것을 볼 때면 놀란다. 한 녀석은 쓰기 싫다고 필사를 하는데, 나는 것도 괜찮다고 그대로 둔다. 곧이어 중딩 아이들이 오고, 똑같이 잠언 한 구절을 붙들고 풀어내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 사정과 사연을 설핏, 드러내며 같이 공유할 때의 알 수 없는 유대감은 놀랍다. 아시죠? 우리, 그, 아빠!

 

서로만 아는 어떤 공감대로 슬쩍, 고개를 끄떡거리며 공유하는 마음이란 안심(安心)이다. 편안한 것이다. 이 사람은 알아도 되고, 이 이야기는 들려줄 수 있다고 여기는 어떤 내용에 대하여. 서로 눈짓으로 또는 그냥 풋, 하고 웃는 신호처럼. 어쩌면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닐까? 처음엔 낯설고 놀라울 뿐인데, 그 앞에서야 비로소 신을 벗을 수 있는. 내 안의 숱한 계획이 있어도 이를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와 같은 말씀이 삶에 있어서 점점 나를 의연하게 하는 것이겠다. 아무도 몰라주는 일에 대해, 누구에게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부끄러움까지도. 나의 이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안도감. 불안이 가시고 걱정이 사라지는 사이.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서 느끼는 평안처럼,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비록 다리가 끌려 자꾸 중심을 잃는 바람에 지팡이를 짚어야 하고, 여전히 어디 왁자한 곳에서는 불안이 먼저 엄습하고, 쓸데없는 고민을 지청구처럼 늘어놓으며 자꾸 아내를 탓하고 누굴 원망하게 되기 일쑤지만. 그러니까 결코 나는 의연하지 않고 느긋하지도 못하면서 그 모든 여건과 상관없이 말씀으로 평안을 얻는 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아이들은 졸망졸망 모여앉아 글을 쓰고 나는 설교 원고 초안을 살피면서, 이와 같은 진리 앞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는 것에 대하여. 나에게 들리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보는 것을 아이들도 들을 수 있다면! 초딩 중딩 나이와 상관없이 그 마음에 들끓는 여러 생각과 생각에 대하여, 뭐라 조바심을 내고 어찌 발버둥을 친다 해도 당장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가만히 읽고,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눈빛을 주면 아이는 피식, 그만큼의 마음이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도 누군 알아준다는 것. 하물며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0-31).” 이를 모두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중딩 두 아이가 놀고 싶어 해서 같이 어디 간다는 걸 그러라고 일찍 보냈다. 한 아이는 고질적으로 지독한 왕따에다 냄새가 풀풀 나는 ‘안 씻는 아이’였고, 한 아이는 ‘혼자 키우는 엄마’의 병적인 간섭과 참견으로 숨도 못 쉬고 살다 집 밖으로 나올 때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치장을 하였다. 둘 다 새해 들어 용돈이 있었고, 큰 애가 떡볶이에 김밥, 돈가스를 사들고 오자 작은 애가 ‘끝나고 놀자’면서 어딜 갈까, 서로 궁리를 하였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보는 것인데, 그렇게 한 시간 일찍 끝내고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대신 너무 짧은 치마를 입었으니 롱 패팅으로 단단히 여미고 다닐 것과 어두워지기 전에 알아서 연락드리고 일찍 들어가기로 입을 맞추었다. 우리 모두는 상한 심령들이라. 하나님 없이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는 은연중에 나의 행복의 비밀을 드러내고,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한데 그보다 못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서야.

 

지혜자는 그와 같은 모순덩어리 인생을 살피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전 9:2).” 그 가운데서 중심잡기. 외형적으로 비춰지는 불공평한 것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확신하고 누리며 즐거워하기.

 

이를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결국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게 다가 아니다. 잠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함인 것에 대하여. 지금은 엄마의 등살에 숨이 막히는 것 같고, 친구들의 외면에 스스로 무장해야 하는 수고로움으로 지치고, 몸은 여실히 어디가 아프고 힘들고 마음 같지 않다 해도.

 

하나님 앞에 평안하기. 이는 억지가 아니라 때론 생경하고 두려운, 불붙은 가시떨기처럼 타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놀라운 불꽃인 것이다. 그 앞에서 신을 벗는 일. 그 피안의 세계에 대하여 다만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리고 확신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늘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 같아요. 중3 아이의 뜬금없는 말에 피식, 웃어주며 굳이 뭐라 토를 달 게 없는. 이 은혜는 엄밀히 우리의 특권인 것이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연말연시를 맞으면서 전도서를 본문으로 삼아 말씀을 음미한 일은 절묘하였다. 내 안의 낙담과 실의는 물론 그 모든 것이 실은 주의 것이며 아울러 오늘의 이런저런 것들이 그 자체로 은혜인 것을 새삼 확인하며 평안하고 감사하였다. 모처럼 오후 내내 아이들이 와글거리다 돌아가고 나는 잠시 누웠다가 십여 분 깊은 잠에 빠졌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씀,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4-6).”

 

모든 산 것들이 소중한 까닭은 돌이키고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와 여전히 주를 부르며 바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 우리 곁에 보내시는 아이들을 나는 이제 그리 이해하고 마주한다. 싫든 좋든,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나는 선생이면서 목사였고 여기는 글방이면서 교회였으니. 잠언을 한 장 읽고 그것을 생활로 연관 지어 자기 이야기를 끌어오게 하는 것은 절묘한 것 같다. 마음에 남은 구절인데 그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면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살짝 건드린다.

 

말씀이 우리 삶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고 실은 그 자체로 우리 인생이 되는지에 대하여, 두 말하면 잔소리다. 나는 화려한 언변과 근사한 체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원어를 다루는 높은 학식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소소한 아이들의 일상이 성경 한 구절로 조명되어, 아 그걸 쓰면 되겠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 풀어놓는 아이들의 800자 또는 1200자 글이 소중하다.

 

우리가 꼭 무얼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이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굳이 다른 말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그러므로 고작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하면 가장 큰 행복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14).” 그것으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