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전봉석 2019. 1. 9. 07:03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애굽기 8:32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95:6

 

 

 

우리는 앞뒤가 다르다. 완고함이 그지없다. 오라, 우리가 무릎을 꿇자. 말씀 앞에 앉아 가만히 돌아보아 나를 비춰본다. ‘이 때에도’ 완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완악함을 생각한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였다.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고,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였다. 안정제를 다시 먹기 시작했나? 물으니 조금 나아진 게 그런 모양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나름 하나님께 바른 삶을 산다고 사는데, 한다고 하는데, 이처럼 되는 일이 없고 하는 일마다 힘들기만 한지 모르겠다고. 카톡으로 나누는 대화라 길게 또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힘내라, 하고 말하자 힘내니까 이 정도야! 하는 답이 돌아왔다. 여전히 자신이 하려는, 살려는 삶의 모양이어서 어쩌겠나싶었다.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도 더는 어쩔 수 없어서!

 

사람으로 오셔야 했고 사람의 모양대로 살다 사람으로 죽어야 했다. 우리 죄를 담당하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때론 우리의 반감이 끊이질 않는다. 누군 믿고 누군 안 믿고, 누군 구원 받고 누군 끝내 불순종하고, 누군 선택하심을 받았고 누군 이내 예정하심에 없고.

 

그럼에도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성경은 종종 난센스처럼 읽힌다. 그건 자꾸 우리가 문제를 풀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아도 인정하기 싫은, ‘설마’하는 안이함으로 되레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삶의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처음 사람들이 그처럼 넘어갔다. 사탄은 말한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아, 이 달콤한 유혹은 뿌리칠 재간이 없다. 날 위해 기도해줘.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어제 누구에게 듣던 말이 성경에 그대로 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출 8:25).” 가지 말고, 이 땅에서 그러라는 소리다. 또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28).” 가긴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것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

 

늘 우리 안에 드는 의문점은 하나님은 어떻게 우릴 위해 이 정도 일도 해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인데. 여전히 우린 그 앞에서 신을 벗지 않는다. 무릎을 꿇기 싫어한다. 적당하길 원한다. 하면 성경은 우리가 취할 자세를 바로 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내가 어찌 해보려는, 나의 신을 벗으라 하심인데.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어쩔 것인가? 그대로 행하기까지는 답이 없다.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으시다. 다른 길이 있었다면 그리하지 않으셨을까? 굳이 사람으로 자신을 제한하지 않아도, 독생자 아들로 이 땅에 오지 않아도, 그 온갖 모욕과 고초와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이내 십자가에 달려 죽어지는 한계에까지 처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면 말이다.

 

다른 방도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우린 여전히 불평하고 의문을 품고 그 답을 얻지 못해, 말 그대로 고군분투 한다지만. 그것이 다 불순종이었으니, 내가 문제를 풀려고 하니 문제밖에 답은 없었다. 풀고 나면 도로 문제여서 결국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항상 우리가 놓치곤 하는 한 가지 사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선하시다는 것. 우리는 주의 영광을 바라고 주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만족함을 얻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의 방도는 없었다. 하나님의 성품이 문제였고 답이었다. 왜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나? 그, 하나님도 어쩔 수 없었던 일에 대하여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하고 묻는 누구의 질문에 답이 될까? 어떻게 하나님도 하나님에게 그러실 수밖에 없었던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답을 얻고자 하여 사는 게 아니다. 인생 답 없다. 바로가 그 예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가 보이는 모습이 날마다 되풀이 되는 나의 모습이지 않던가? 그럴 것처럼 그러다 금세 또 마음이 변하기 일쑤고, 더 완강해져서. 그랬다가 나름 방도를 찾은 것이 ‘이 땅에서’, 또는 ‘조금만 떨어져’, 그리고 ‘나를 위해.’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힘드니 올해를 어찌 살아야 하냐며 저는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스스로 아자, 새 힘을 내려 애쓴다.

 

뭐라 할 말이 없어, 하박국서의 끝부분을 적어보내주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어찌 들었는지, 마음에 새기는지, 그냥 덮었는지, 더는 답이 없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다 알 수 없다. 안다고 할 때 이미 하나님과 동등 됨이다. 아니면 그 이상이 된다. 모르는 게 당연하고 아예 묻지 말아야 할 물음도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내가 제기하는 의문점은 번번이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 소용되기 때문이다.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일갈하신다.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합당하도다! 합당하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 6:2).” 헛되어 그게 얼마나 헛된지, 악한 병이로다! 또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3).”

 

답답할 노릇이다. 납득이 안 된다. 합당하지가 않다. 그것이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7).” 그러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 무엇으로도 만족함을 누릴 수 없는 일인데, 싫은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이미 충만함으로 더하여 주신 삶이었다. 그런 삶에서 그러고 있는 꼴이었으니!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우리는 우리 이해로 다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질식할 것 같다. 도로 우울증 약을 먹고 버티면서 잘 될 거야! 날 위해 기도해줘! 하면서 새삼 각오를 다지는 일에 뭐라 할 말이 있어야지!? 하나님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 방법을 쓰셨을 것인데, 이내 죽어주심으로만이 우리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어서. 곧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유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사랑이었고 기어이 그 사랑을 향한 공의이셨다.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심으로!

 

이로써 율법을 충족시키셨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러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죽음을 이기기 위해 죽으셨고,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는 우리가 다만 영접함으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곧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더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일이며,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런 그가 능히 도우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우리는 이제 그 영광 앞에 기쁨으로 선다. 저는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유 1:24).”이시다. 그러기 위해 그냥 다 용서해주실 수 없었던 것처럼, 그냥 다 잘 되게 해주실 수는 없다. 바라고 구하는 일을 끝내 들어주실 수 없을 때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이는 우리의 구원의 필요를 채우시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였다.

 

그런데 또 죽겠다고 앙앙거리며 기도를 부탁하고 주께 기울던 마음이었는데,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8:32).”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와 같은 악순환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우리 수준에서 납득하려고 하는 이상, 고작 그 정도로 만족했다싶으면 또 실패하고 만족했다싶으면 또 실패하기를 죽기까지 할 수밖에는. 아,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