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전봉석 2019. 1. 10. 07:11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애굽기 9:16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시편 96:6

 

 

곧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함부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구는 것이 악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남다른 안목을 필요로 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 6:2).”

 

이를 이루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하나님은 바로도 들어 사용하신다. 저의 교만도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17).” 그러므로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시 96:6).” 이와 같이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지며 말씀하신다. 말씀이 흘러넘치는 곳이 성소다.

 

초딩 녀석들이 하나둘 잠언을 한 장씩 읽고 녹음한 것을 카톡에 올렸다. 방학 숙제로 읽거나 쓰거나 집에서 한두 번 그리하라 일렀더니 말이다. 중딩만 돼도 안 한다.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미루는 것이다. 고작 한두 살 차이로 초딩 중딩으로 나뉘지만 순종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못하고 전혀 안 할 줄 알았던 녀석이 가장 여러 장을 읽고 여러 번 녹음하여 올렸다. 기특하고 대견하여 감동스럽기까지 하였다.

 

조금 낫다, 잘났다 싶으면 금세 거들먹거리며 교만이 목을 치켜든다. 스스로 그리 여기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지목하셨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6).” 으스대고 우쭐하여 마치 자신이 주도할 수 있다고 여기는 한, 그 삶은 기어이 살아서 사는 동안에 배우게 될 고통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확연히 다르다. 저처럼 아이들을 통해서도 지혜의 소리가 들린다.

 

분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속엔 선한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아이들의 면면에 대해 자꾸 왈가왈부할 거 없다.

 

처음에는 내 이야기에 몰두하여 입만 열면 그렇게 할 말이 많더니 다음은 누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저의 이야기에 그토록 몰두하다가 이내 우리들 이야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야기, 그 하시는 일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책 읽기에서도 그와 같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개별적인 어떤 특수한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것은 나와 같다는 동질감에서 시작되었다가 다양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구구한 나의 이야기나 저들 이야기는 결코 그 이야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오늘 바로를 향한 주의 음성도 그리 들린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저가 어떤 자이고 얼마나 악하고 미련하였는지를 조명하는 게 아니다. 그런 가운데 주의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음이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시 96:6).” 그러므로 성소란 특정한 장소나 지엽적인 구분의 의미가 아니라 주의 능력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곳이다.

 

가장 못하고, 늘 신경 쓰이고, 안 됐고. 그런데 고약하고 심약하며 못된 녀석이 또박또박 잠언을 읽고 그것을 녹음하여 숙제로 보내왔다.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리한 것이 대견하고 또한 감동이었다. 주가 이루신다. 결코 헛되이 읽혀지고 버려질 말씀이 아니다. 참 행복은 그런 것 같다. 종일 혼자 있으면서 웃을 일도 없던 내게 아이의 떠듬거리며 읽는 녹음된 목소리가 간지럽게 웃겼다. 너그러움이란 이렇듯 저절로 미소 짓게 하는 고마움이 늘어나는 일이다.

 

그러려면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일이다(딤전 6:17). 아이들이 귀한 건 그래도 또 그렇듯 순종한다. 어설프고 엉뚱하고 대충 그리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하려고 하는 그 의지나 수고가 기특하고 대견하여 흡족한 것이다.

 

아,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18).” 주의 성소에 산다는 건 엉뚱한 데 동떨어져 뭔가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리 여기며 스스로 만족하는 경건이 아니었다. 보잘것없으나 늘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오늘은 어디가 아프면 아픈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묵묵히 그 모든 배경에는 하나님이 주도하심을 신뢰하는 일. 저 아이의 어설픈 목소리, 어딘가 부끄러운 듯 조금은 떨리고 떠듬거리면서도 한 장의 잠언을 소리 내어 읽고 녹음하여 숙제를 마친 후 까불까불거리는 것에 같이 풋, 하고 웃어주는 일.

 

모든 창조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이와 같은 원리로 바로도 그 쓰임에 합당하게 지으셨고 그리 사용하신 게 된다.

 

누구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누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출 9:21).” 그러니 잘났다고 여기며 자기 나름의 판단과 기준으로 사는 자가 있고, 엉성하고 어눌해도 순종하고 순응함으로 사는 자가 있다. “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31-32).”

 

요즘 부쩍 마음을 사로잡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이를 오늘 말씀에서 ‘꽃을 피운 삼과 보리는 상하였으나, 밀과 쌀보리는 상하지 않았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주의 일하심에 집중하게 된다. 저 아이의 대견한 수고가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본래 그렇듯 하루는 길고 일 년은 금세다. 엊그제만 해도 지난해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은데, 종일 혼자 있을 때는 시간이 그처럼 길 수가 없다.

 

그러다 아이의 카톡 한 방이 나를 웃음 짓게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였다.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3:11).”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주를 기쁘시게 할 소리가 아니겠나? 어떻게 아이 목소리를 나의 글자로 표현할 길이 없어, 나는 지금도 배시시 웃는다. 그러자 네 명의 아이들이 서로 경쟁하듯 마치 미루고 있었던 걸 서둘러 행하려는 듯 하나둘 잠언을 한 장씩 읽고 녹음하여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까불까불거리며 누구 흉을 보던 녀석도 어색하고 쑥스러운 듯 떠듬거리며 소리 내어 읽는 말씀이라니! 한 가정의 가장 행복한 소리는 어머니의 도마소리와 아이의 책 읽는 소리라 했다.

 

이제 아이들은 의기양양 올 것이다. 마침 아내가 끝나고 마중을 나와 같이 오면서 아이들 줄 과자를 샀다. 그래봐야 젤리와 여러 개 묶은 값싼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 마음이 가고 손이 닿는 게 당연하였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내가 대신 지고 갈 수는 없지만 같이 갈 수는 있다. 한 번에 한 숟갈씩, 굳이 서둘 거 없다. 잘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했으니 됐다. 때론 필요 이상으로 애쓰는 일보다 불순종도 없다.

 

자꾸 덧대어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느라 해야 할 걸 미루거나 유치하다고 여겨 다르게 하려하다 그만두는 일이 부지기수다. 초딩 아이들과 달리 중딩 아이들이 그랬다. 아무도 대꾸가 없었고 뭘 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리곤 나중에 물으면 더 잘 하려고 했던 것이 결국은 안 하게 된 이유고 미루게 된 이유다. 보면 그게 어디 중딩이어서일까? 순종이란 ‘그냥’에 가깝지 ‘잘하는’ 게 아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하다 안 하니만 못한, 하다 만, 하나마나 한 것이 되기 십상이다.

 

보면 다 주가 하신다. ‘성도의 견인’이란 그런 의미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따를 수 없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내게 주신 것 때문에 나는 주를 따른다. 곧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우리가 확신하는 그 믿음으로 하루를 산다. 여기가 성소다.

 

어쩌겠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출 9:21).” 살아서 끝내 삶으로 배워야 하는 일이라면 그리 살아보는 수밖에. “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31-32).” 이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 94:4-5).”

 

그래서 나는 종종 그냥 한다. 그럼에도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6).” 주가 이루시는 일이었다. 고로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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