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출애굽기 10:27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시편 97:11
‘여호와께서, 하셨으므로.’ 주가 이루어 가시는 세계를 가만히 되새기며 묵상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이어 말씀을 찾아 그 의미를 더한다. 이로써 바로의 마음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시다.
왜! 우리 안에 이는 의문점은 주를 바라는 데 동력을 이룬다. 이 모두는 “의인을 위하여”이시다. 저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1).” 왜 이런 일을! 하고 그 문제에 몰두하면 길을 잃는다. 문제에 답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길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래서 문제를 안고 사는 경우와 딛고 사는 경우는 다르다.
둘 다 문제가 있으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게 된다. 아이 하나가 있다. 저 아이는 ‘기분부전증’을 가지고 있다. 경미하지만 우울감이 2년 이상 지속적이다. 왕따이면서 왕따가 아니라고 여긴다. 왕따가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왕따인 자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늘 말에 토를 달고 호언장담을 일삼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번번이 실망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어서 욕먹을 짓을 한다. 상대가 자신을 외면할까봐 상대를 괴롭힌다. 굉장히 자존감이 높은 것처럼 굴지만 한없이 낮다.
자신을 더욱 중요히 여길수록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껴진다. 실은 상대가 원하는 데 맞추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휘둘리기 싫어서 휘두르지만 자신이 휘든 팔에 자신이 뺨을 맞는다. 뭐라 하면 금세 좋았다 나빠진다. 아이를 상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느니 외면한다. 그럼 또 고분고분 다가온다. 같이 무얼 도모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방학동안의 수업 시간을 맞추는데도 이랬다저랬다 분간이 어렵다. 때론 자신이 힘들면서도 남을 배려하고, 그래놓고는 서러워한다. 늘 그 안에 허무맹랑한 이상을 그려놓고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깎아내린다.
고슴도치 같다. 혼자 있고 싶다면서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한다. 의존 성향이 강하면서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위를 물린다. 중2 아이가 혼자 노래방엘 간다기에 그럼 같이 가라고 말해주니까 슬쩍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요! 아이에 대한 모두의 반응이었다. 아이만 모른다. 그저 자신에게 몰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부모의 별거 아닌 별거 중인 어중간한 사이. 엄마의 잦은 잔소리. 아빠의 무심함. 오빠의 방종. 아이를 둘러싼 세계가 녹록하지 않다.
언뜻 그런 자신을 비춰 눈길을 주면 얼른 또 숨기고 시치미 뗀다. 어떻게 다가갈 길이 없어 나는 가만히 예의주시할 뿐이다. 누구에게 의존할 때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안은 불만을 가중시켜 이내 두 관계는 어그러진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의존하면서 상대를 괴롭히는 꼴이다.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혹한 것 같은데 돌아서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 거짓말이 상시 몸에 배어 있다. 슬쩍 꾸며낸 말은 거짓말 같지도 않다. 실제와 꾸며낸 말 사이에서 아이는 혼동한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3).” 오늘도 바로는 우리 내면의 본색을 마주하게 하는 것 같다. 고통이 가해질 때 보였던 모습과 그게 가시면 또 금세 돌변하여 마음이 점점 완강해진다. 나는 아이와 둘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대놓고 그럴 수가 없다. 아이 곁에 더 어려운 아이가 있다.
저들의 공통점은 그저 그러려니 자신들의 기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글방을 나서면서 혼자 코인노래방에 갈 거라는 아이를 나는 어찌 배웅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린다.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출 10:28).” 마음에 서린 독기가 느껴진다. 어찌해야 하나!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저 두툼한 아이의 오리털 점퍼를 툭툭 쳐주고 보낸다. 독기 서린 아이의 마음이 애처롭다.
당장 어려운데, 항상 지금이 제일 괴로운데, 기도해도 소용없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 날들이라, 사는 게 더 각박하기만 한 것 같은데.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히 1:1). 다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다르지만,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2:11).” 나는 주춤거리다 아이가 돌아가고 신음소리처럼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아이를 아뢰다 내가 주께 의뢰한다. 손을 들어 주께 펴는 경우와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경우는 엄연히 다르다. 내 안에 들락거리는 아이로 인해 나는 주께 나의 무력함을 아뢰며 손을 펼쳐 보인다. 하나님 앞에 승복하는 삶이 지혜다. 바로는 상대적으로 그 끝 간 데 없는 사람의 의지를 표본으로 보이시는 것 같다. 결국은 갈 데까지 가야 하는!
죄란, 기어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쇠락하게 한 뒤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무력증으로 또는 더욱 완고함으로 도대체 권함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출 10:29).” 더는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주를 바라는 일.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 97:12).” 뜬금없이 무술을 배우겠다고 비싼 돈을 내고 이틀 만에 몸살이 나고, 하필 또 생리가 터졌다.
이래저래 울고 싶은 아이에게 나는 속수무책이라. 다른 애들도 같이 있으니 속엣 얘길 듣기도 어렵다. 그러니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6:9).”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이 얼마나 유약하고 어리석은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봐라,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말을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된다. ‘꼴, 좋다!’ 하는 식의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가득한 양가감정이다. 저 아이의 일이 나를 보게 하는 것이다.
바로의 작태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태도 아닌가. 이랬다저랬다, 마치 나는 그게 아닌 것처럼 굴지만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10).”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두신 것이다. 이를 히브리서는 첫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들을 것인지, 기어이 외면하고 완고할 것인지.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이를 알게 하시려고, 알기까지 그리 놓아두시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고약한 게 아니라 우리의 본질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확인할 따름이다. 신기할 정도로, 아이는 외면한다. 말을 건네고 어찌 손을 내밀 방도가 없다. 그러느니 혼자 코인노래방에 들러 신나게 노래 한 곡 부르는 게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니!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왕하 19:28).” 주가 이루실 일에 있어 그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묵묵함밖에 없겠다. 더는 말이 안 되니 아이 어깨를 툭툭 쳐주고 배웅하는 것으로 언젠가 주께서 돌이키실 날을 준비한다. 하긴 대나무도 그 잎을 내는데 4년이 걸린다고 하니! 하다못해 10여 일 살기 위해 7년을 땅 속에 산다는 한낱 곤충도 있는데 하물며.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전 6:12).” 주가 주셔야 할 마음이고 알 수 있는 지식이었다. 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 늘어갈수록 말씀을 되새기며 그 뜻을 바랄 수 있는 게 가장 큰 은혜였다. 전달에 이어 전도서를 곱씹는 묵상은 그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오래 머금고 있다 삼키면 어느 것도 비추지 못할 의미는 없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말씀이 있어 참 귀하다. 아이에 대해 어쩔 수 없어하는 나의 안타까움도 주의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한 것도 없으면서 이런 표현이 송구할 따름이지만,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알 수 없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면서 나는 오직,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곧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97:11).” 주께 의뢰하고 더욱 바라는 길밖에.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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