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전봉석 2019. 1. 17. 07:11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출애굽기 16:17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편 103:8

 

 

‘이게 뭐지?’ 하는 만나의 삶은 계속 된다. 늘 보면 남음도 부족함도 없다. 안달은 그저 각자의 몫이라, 짊어지고 씨름해야 하는 힘겨움이다. 나로 하여금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데 감사하다.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의 변덕과 어처구니없는 원망에 치를 떨다가도 나 역시 다를 바 없다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은 무엇일까?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 남들처럼 여느 사람들이 누리는 정도의 삶의 그 가치를 더하는 것일까? 우리는 주를 섬기는 삶으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그리하여 우리로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심이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이는 이제 공식과 같다.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 되고, 우리는 구별된 자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항상 주의 도우심을 받는다. 곧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헤어났고 머잖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오전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히브리서 강해>를 놓고 혼자 성경공부를 하듯 한 단락씩 읽고 정리하고 묵상하였다. 전날에 이어 동생이 들러 같이 점심을 먹었다. 한참 아이들에게 돈 들어갈 때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뭘 그렇듯 자꾸 일을 만드나, 하고 핀잔을 하다가도 그 심정은 이해가 되었다.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마음이 든든하여진다. 가난도 질병도 어떤 실패와 좌절도 우리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묶는다. 승리의 풍성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그러므로 제일 되는 기쁨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는 예전의 죄의 속박으로부터 얽매이지 않는다. 잠시 무슨 이야기 중에 내가 하나님을 등지로 살던 때의 이야기가 나왔다. 동생이니 못할 말이 어디 있겠나만, 어떻게 그러고 살았나 싶게 환멸뿐이라. 다시는 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탄의 속박이 더는 나를 옭아맬 수 없다. 이를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곧 구원 받았다는 걸 스스로 먼저 아는 것은 전의 삶에 진저리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데서야 안도하는 마음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9-20).” 이 화목은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린 화평을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주 앞에 나올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전에는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불편하고 답답했었다. 그러고 있는 나의 부모와 형제가 한심하게도 여겨졌다. 그러는 동안 세상 것을 취하며 더 나은 즐거움을 바랐다. 이제는 ‘여기가 좋사오니’ 주의 성소에 있음이 복되다.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저의 거룩함을 덧입었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2:11).” 그런 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곧 구별된 사람이 되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나로 알게 하시는 것,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나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확신한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어떤 후회나 부끄러움까지도 돌이켜 주의 선하심으로 바꾸어놓으셨다. 가령 오늘의 나의 지질함이 나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하기보다는 ‘아이’를 향한 주의 마음을 가늠하게 하는 저울이 되는 것이다. 가령 주중에 한 번 만나자, 하고 인사를 한 뒤여서 다섯 시 퇴근에 맞춰 어디서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 일이면 굳이 거기까지 그 시간에 가지도 않을 텐데, 녀석은 다섯 시 퇴근이라더니 여섯 시가 다 돼 끝났고 그래서 나는 한 시간 반을 또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마음이어서 신기했다.

 

밖이라 그런가? 아이의 횡설수설하는 동문서답은 더욱 심했고 그 의중을 알 수 없어 내가 다소 불안해하기도 하였다. 하여튼 이른 저녁을 같이 먹고 그러는 동안 이런저런 회사 일이나 아이 일상을 묻고 돌보고 마음을 두는 일에 대하여, 종종 느끼는 것이 내게 두시는 어려움이 아니면 이처럼 또 마음이 쓰이겠나싶은 것이다. 전에 같으면 더 잘나고 더 온전한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 내가 더 굽실거리듯 사람에 겨워 살았을 텐데.

 

이 모든 게 주의 기쁘신 뜻대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그러니 원망과 시비가 없으면 좋으련만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죄악 된 마음은 어쩐다? 그리스도인이 됐으니 더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겠나? 그럴 수 없다. 불안과 초조는 여전하고 불신과 불만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도로 예전처럼 굴 때가 얼마나 잦은지!

 

한데 그 구분이 이제는 분명하여서 전에는 그럼 더 완고하여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등졌다면, 이제는 그것으로 주를 바라보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불편해한다. 툭, 튀어나온 혈기 때문에 저녁에 드리는 가정예배가 어렵고 말씀 앞에 앉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을 나 혼자 찔려 주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애통함이란 그런 것이었으니, 나는 도무지 구제불능인 것을 주께 아뢰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다.

 

그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죄를 범하지 않고 살고 싶은데, 죄를 범하여도 우리의 대언자가 계셨으니, 저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항상 우리에 대한 사랑이 동일하시고 불변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래서 더는 전에처럼 굴 수 없다.

 

여전히 그러곤 한다지만 그래놓고 내가 주께 부끄러워 하나님과 불화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매순간 하나님이 내게 필요하다는 사실, 주가 가까이 계시면 나의 그 어떤 죄악 된 모습도 주 앞에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이와 식사 자리에서 이와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또 같은 죄를 짓곤 한다 해도, 그처럼 죄의 끈덕진 유혹과 시험을 주님도 당하신 분이라 누구보다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시고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곧 이제 우리는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삶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그리하여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더는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언자가 되심이다.

 

그러한 우리의 삶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일갈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 16:17).” 어! 이게 뭐지? 하는 그 ‘만나’의 삶은 우리의 특권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9).” 그러므로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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