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전봉석 2019. 1. 16. 07:05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출애굽기 15:3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7

 

 

찬송과 경배로 노래하던 입에서 채 사흘 길도 안 돼 원망이 터져 나온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출 15:22-23).” 그러니 앞서 감사와 노래로 올려드렸던 게 멋쩍을 따름이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24).” 사람 참, 별 거 없다.

 

기쁘고 즐거워 찬송하던 찬송이 금세 무색해져 원망과 탄식으로 이어지는 게 꼭 오늘을 사는 내 마음 같지 않나싶다. 그럼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그 기쁨은 진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즉흥적으로 흥에 겨워 감정만 부추기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30).”

 

또한 그 기쁨은 소유하고 잃지 말아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 그럼에도 우린 얼마나 자주 말초적인 즐거움으로만 기쁨을 그리 여기고 바라고는 하는지 모르겠다.

 

저들은 고백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저들도 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1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18).” 그런 그들이 채 사흘 길에 지쳐 물을 찾고 원망하여 마라의 쓴 물을 마신다. 그럼에도 말씀은 그런 우리를 향하여 주는 언약하시고 위하여 치료하시는 것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6).” 순종하고 의를 행하여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를 준행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이시다. 곧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7).”

 

그리 여겨지고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이 복인데, 그렇다면 이 찬송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는 피하고,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자제해야 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다음은 이 사회에서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곧 대적하고 피할 것은,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그래서 더러운 마음을 버리고,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사욕을 따르지 말며,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잠 7:22).”

 

전에 알지 못했던 때의 삶을 벗어버려야 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 그러할 때 바로 즐길 줄 알고 기뻐할 줄 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

 

이로써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비로소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헛되지 않은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따라서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할 수 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주를 바라고 산다는 일은 이상이나 낭만의 삶이 아니다. 보면 이보다 치열한 게 없다. 그런데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것을 따르며 놓고 싶지 않은 취미와 오락과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주를 따른다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만큼 쉽지 않고 고달플 따름이다. 동생이 송도 쪽 어디 무슨 교육 프로그램에 인턴과정을 신청했는지, 그런저런 일로 들러서 모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일을 벌이고 무언가 모색하는 생활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나야 늘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라, 그 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란 말씀을 찾고 누가 어찌 사는가, 글로다 배우는 꼴이었으니. 돌아보면 젊은 날 그처럼 함부로 굴며 기웃거리던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게 그리 경계를 두도록 하시는가보았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그것 또한 내게 두시는 은혜라. 동생의 분주한 생활에 대해 내가 뭐라 할 것도 아니고, 무엇이 어떤지에 대하여도 주가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문제였으니.

 

종종 나는 누가 하나님을 들먹이며 자기 사욕에 이끌리는 일을 매우 경계한다. 교회 건축을 하라 하신다는 둥, 무슨 총회에 임원으로 나서라고 하셨다는 둥, 도대체 그런 마음의 확신을 무슨 근거로 그처럼 들먹거리며, 기도를 운운하고 확신을 더하는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내가 제일 못 믿는 게 나 자신이라, 어디서 감히 하나님이 뭘 하라 하셨다는 둥, 하는 따위의 말로 하나님의 일을 운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저런 얘길 듣다보면 정말이지 그러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작심삼일이란 말처럼 고작 사흘 길에 저처럼 목마름으로 주를 원망하고 애굽을 그리워하는 게 고작 인간인 것을. 모르겠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가. 아니면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나의 모습에 환멸이 들어 그러는 것인가. 사람 앞에서 샐샐거리고 호언장담하는 투의 사람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하물며 기도해봤더니 하나님이 뭘 하라하시더라는 둥, 어디로 가라 하셨다는 둥, 하는 따위의 말들을 혐오한다. 누가 어떠니저떠니 내가 옮겨 적을 내용도 아니다.

 

부디 죽는 그 순간까지 말씀 붙들고 살자. 돌아서면 또 금세 원망이 툭, 터져 나오는 별 볼 일 없는 위인이지만 그럼 다시 그 자리에서 말씀 앞에 앉자. 부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지금의 가난을, 질병을, 어떤 고초를, 어려움을, 어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나만. 자고로 주를 따른다는 삶이라면 험난한 기쁨과 지난한 즐거움이 함께 하는 법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별 수 없는 일, 더는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곧 굳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내게 두시는 육신의 고통이 유익이지 않겠나. 나의 무료하고 외롭고 우울하기까지한 혼자 있는 시간이, 더는 어떨 수 없는 실의와 낙심이, 또는 열등의식까지도 그것이 어떤 일보다 값진 것이어서 내게 두시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진리의 역설을 사랑한다.

 

나는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으며 순간 그처럼 훅, 치고 들어오는 죽음의 절망 앞에서 과연 무얼 할 수 있겠나? 곰곰이 생각해보곤 하였다. 두 달밖에 못 산다는 것이 2년이 되고 또는 20년이 된다한들, 기어이 죽음은 오는 것이고. 그러하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붙들고 무엇으로 저를 맞이할 수 있을까? 저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폐암으로 죽었다. 죽음에 앞서 자신의 이야기를 수필로 적었다. 인생을 이분기로 나눠 40년은 의사로 과학도로 살다, 이어 40년은 작가로 살기를 꿈꿨었다. 그런데 덜컥, 찾아온 죽음의 덩어리 암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얼 붙들고 살았을 때 가장 견고할 수 있을까? 기도와 찬송은 감정에 휘둘리기 쉬워서 머리와 가슴이 삶과는 따로 놀기 십상이고, 그렇다면 말씀뿐이지 않을까? 뜯어 먹듯이 하나하나 나는 나의 삶에 말씀을 붙이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도 누가 인용한 말씀을 꼭 메모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쓸 때 내 생각을 쭈욱, 나열하기보다 자꾸 더 말씀을 찾아 말씀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도 그래서이다. 말씀 또한 듣기 좋은 구호가 되지 않게 하려고, 내 삶에 갖다붙인다.

 

누굴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고, 어떤 일에 요즘 힘들어하는지, 어디가 아픈지, 마음은? 몸은? 일일이 사사건건 말씀으로 비춰 성경이 내 이야기가 아니면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아무리 인자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셔서 모세가 어쨌다고 한들. 다윗에게 어떠했다고 한들. 결국은 내 이야기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호화로운 ‘그림의 떡’보다 한 입 베어 물 수 있는 개떡이어도 좋으니 말씀이 곧 내 이야기로 들려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쓰여지는 이 모든 이야기가 가장 말씀에 적합하였으면 좋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원망을 뭐라 할 수 없다. 사흘 길이 아니라, 서너 시간도 못 돼 나는 저들보다 먼저 원망하고 탄식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고로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주의 힘으로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의 인도하심으로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셔야 한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18).” 그러므로 그렇게 나의 남은 생은 이어지고 꾸려졌으면 좋겠다. 곧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2).”

 

그러므로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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